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안 Sep 24. 2020

매니저의 비용

-오늘의 조언

고등학교 때 성적은 형편없었다. 전신주 사이를 윙윙대고 집 창문을 덜컥거리는 바람을 두고는 ‘강풍’이나 ‘엄청난 바람’ 같은 표현을 쓰면서 호들갑을 떨지만, 산을 무너뜨리거나  배를 뒤집는 바람에는 그저 멍해진다. 당시 내 성적이란 게 그래서, 잘한다 못한다가 의미가 없었다. 성적표를 한 번이라도 흘끔 본 사람들은 ‘이런 점수로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라는 강렬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운 느낌을 받았다. 책상 앞에 앉아 10분을 못 견뎠다.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태평하다면 태평하고 한심하다한심한 고등학생이었다.




당시엔 오빠가 내 일을 전부 결정했는데(부모님이 계셨으나 전권을 위임했다), 입시 원서를 쓸 때가 되자 ‘유아 교육과’ 지망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학교에 일이 생겨도, 용돈을 는 것도, 부모님과 문제가 생겨도 해결해주는 것은 오빠였기 때문에 당연히 말을 들어야 했다. 성적이 형편없어서 아무 곳도 붙을 확률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은 가벼웠다.


사람에게는 재능과 능력이라는 것이 있다. 취향이라는 것도 있다. 나라는 사람은 ‘유아를 교육’하는 것에 재능과 능력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아이들도 나 같은 사람을 따르는 취향은 없다(지금도 밖에서 아가들과 우연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입을 삐죽이다 울음을 터트린다. 어이, 나 아무 짓도 안 했단 말이야! 미안, 미안……).




재수할 때는 제법 성적이 올랐다. 원서 쓰는 계절이 돌아오자 다시 ‘유아교육과’ 카드가 나왔다. 망설였다. 붙을 확률이 조금이나마 생겼기 때문이다. 워낙 강경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원서를 썼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기 많은 학과다. 재수생 입장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다행히 다 떨어졌다. 그때서야 ‘그 전공을 택하라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라는 질문을 했다.


주민등록증이 나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미래도 제 맘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른도 뭐도 아니다. 당시 내가 딱 그랬다. 내게 ‘유아’를 ‘교육’할 재능이 없다는 것은 오빠도 알고 있었다. 오빠는 ‘이런 얘기까지는 하고 싶진 않지만’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대답했다.


“나중에 남편에게 맞으면서도 경제력이 없어서 이혼도 못한다고 우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서.”


스물두 살 남자아이가 보기에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사십 넘은 지금의 내가 봐도 세상은 물론 만만하지 않다). 맹하고 멍청한 여동생은 걱정된다. 뭔가 그럴듯한 직업이라도 갖게 만들어야 한다. 오빠의 생각은 대강 이런 과정을 거쳤던 것 같다. 그래도 싫다는 여동생을 윽박지르기에 너무 여리고 연약했던 오빠는 이듬해에는 깨끗하게 포기했다. 나는 취업률은 형편없지만 가고 싶은 학과에 진학했다.


나에 대한 예언은 거의 정확했다. 물론 ‘남편에게 맞아서’는 아니지만 이혼을 했고 뭐 울기도 했다.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운과 인내력이다. 아이가 딸린 이혼녀에게 얼마나 깊고 강인한 인내심이 생기는지 스물두 살 아이는 결코 알 수 없다. 지금도 공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나온 선생님들을 스쳐갈 때면 대학을 다 떨어진 것이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지만 애들은 무슨 험한 상황을 볼 뻔했나.




이따금 인생에 매니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지금은 이 일을 하는 게 맞고, 이런 상황은 이렇게 풀어가라 알려주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출퇴근만도 버거운데 집안 일과 가족 행사가 겹치고 여기에 세금이나 이사 같은 문제라도 하나 더해지면 곧 숨이 넘어갈 것만 같다. 하지만 안다. 그런 사람은 있을 수도 없고, 있다면 ‘비용’이 든다는 것을 말이다.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과 ‘나’는 다르다. 어쩌다 보면 열아홉 살에는 흔적도 보이지 않던 인내심이 온몸에 찰랑거릴 정도로 넘치게 된다. 아무리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변화까지 알 수는 없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얼마큼 걸어갈 수 있는지 희미하게 짐작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최대한 해 줄 수 있는 정도는 유아교육과를 권하는 정도다. 를 사랑하지 않아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없는, 최선의 일을 권했을 뿐이다. 문제는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매니징 한다면 그의 판단을 존중해야 하고 적어도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내 판단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비용’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석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불필요한 비용’까지 지불하기에 삶은 너무 바쁘다. 게다가 언제까지 매니저의 말을 들을 것인가? 가끔 회사로 전화 주시는 ‘부모님’들이 계시는 것 안다. 자, 언제까지 그러실 것인가?


-오늘의 조언 : 인생, 결국 혼자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