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가져본 사람들은 안다. 아이가 생겼음을 나타내는 징표로 의사가 보여주는 것은 서류가 아니다. 대신 의사는 초음파 장치를 곧 어머니가 될 여자의 몸에 연결한다. 그리고 아직은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작은, 점보다 조금 큰 물체를 가리킨다. 그 점은 떨리고 있다.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심장이 잘 뛰고 있어요. 소리가 들리시나요?”
기계에 달린 스피커로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그러니까 ‘생명’을 나타내는 첫 징후는 심장이다. 당신의 심장이 뛰었던 때를 기억하는가? 아마 첫울음을 울던 때 심장은 터질 듯 뛰었을 것이다(나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때를 기억할 리가 없다). 사랑에 빠질 사람을 만났을 때, 내 심장은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뛰었겠지(사실 이것도 별로 기억이 없긴 하다. 기억나는 분께 응원을 보낸다). 지금의 나는 이십 미터쯤 뛰고 나면 심장이 벌렁거린다. 무서운 영화를 볼 때, 심장은 내 손바닥 위로 떨어질 것만 같다. 그리고 이럴 때 나는 나 자신이 ‘물리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오랜 시간 우리는 누군가의 호흡이 멈춰 선 시간을 ‘죽음’과 만나는 지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59년 모리스 굴롱과 피에르 몰라레는 ‘죽음’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도입한다. 심장은 인공호흡기로 뛰게 할 수 있다. 뇌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더 이상 사고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선언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 명제의 의료적 선언처럼 들린다(그러나 평소에도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은 어떤 범주에 속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긴 한다). 이 선언 이후 뇌파가 없는 코마 환자는 ‘죽은 것’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은 맞는 말일까? 이 연극이 묻고 있는 많은 것 중의 하나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극장 안은 헐떡이는 심장 소리로 가득 찬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심장’에 대해 말한다. 하루에 10만 번씩 수축되고 1분마다 최대 5리터의 피를 돌게 하는 심장. 삶의 순간을 모두 기록해 놓은 심장. 심실과 심방으로 이루어진……. 이런 사실의 나열들이 A4지 한 장은 족히 될 분량은 될 정도로 쏟아져 나온다. 무대가 밝아지며 심장 소리는 파도의 철썩임으로 바뀐다.
이야기는 새벽 5시 50분에 시작한다. 19세 청년 ‘시몽 랭브르’가 파도를 타기로 결정한 그 시각이다. 친구들과 어두운 바다로 뛰어나온 그는 파도를 바라본다. 그의 심장은 뛰고 있다. 서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꼈을, 거친 파도에 대한 공포와 그 위에 올라타고 싶다는 욕망의 두근거림. 시몽은 새벽 찬 겨울의 바다로 뛰어들어 기쁜 마음으로 거대한 파도를 느낀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돌아오는 길의 교통사고.
커다란 무대 위에는 배우와 작은 탁자, 가끔 의자가 등장한다. 배우가 쉽게 들어 옮길 수 있을 만큼 작은 소품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인극. 한 배우가 나와 오롯이 열여섯 명의 역할을 해 치운다. 배우 뒤 스크린에 보이는 파도, 시계, 컴퓨터 화면 같은 것들이 기꺼이 배우를 돕는다. 심장소리와 파도 소리, 이따금 지나가는 음향은 관객들이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또 다른 극적인 도움은 조명으로부터 온다. 그와 그녀, 사고가 일어난 적 없는 시공간과 이후의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은 단순한 조명 아래서 나눠진다. 절망스러울 정도로 생생하다.
이 연극은 24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다룬다. 활기찬 청년인 시몽이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지면서 그의 장기를, 특히 심장을 50대의 마리안에게 이식하는 과정이 주된 줄거리다. 현대 의학에서 심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수선’하는 방법은 이식뿐이다. 살아 있는 누구도 자신의 심장을 ‘기증’할 방법은 없다. 당연히 ‘심장을 수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누군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의 ‘죽음’만이 다른 생명을 ‘수선’하여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죽음으로 삶을 만든다. 아이러니다.
가끔 우리는 ‘장기기증’에 대한 기사를 접한다. 딱 꼬집어 말하지는 않지만, ‘한 명의 고귀한 희생으로 몇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감정이 그 안에 담겨있다. 가끔 ‘장기를 기증받은’, 그래서 ‘삶을 수선한’ 사람의 인터뷰가 실릴 때도 있다. 그들의 삶이, 미래가, 꿈이 요동치기 시작한다고 기사는 말한다.
그러나 그 ‘새로운 삶’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된 것이다. 기증자는 매우 활기찬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기증자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증자는 아름다운 현재와 빛처럼 환한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증자는 연어처럼 팔딱이며 삶의 모든 순간을 느끼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혹은 그녀의 삶을 모른다.
이 연극은 그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고를 당한 시몽과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를 병원 침대에 눕힌 간호사, 진료한 의사, 시몽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의 여자 친구, 코디네이터와 이식 수술을 집도한 의사, 그의 심장을 기증받은 마리안 등 총 열여섯 명의 인물이 무대 위에서 자신의 말을 쏟아낸다. 물론 배우는 한 명이다. 일인극이라고 했지 않은가. 가능하냐고? 매우 훌륭했다. 작은 테이블 위에서 파도를 기다리는 다리는 시몽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텅 빈 테이블 위에서 움직이는 손은 심장을 꺼내는 외과의사 비르질리오의 그것처럼 단호하다. 그의 심장을 마리안에게 이식하며 다시 뛰기를 바랄 때에는 모두 함께 간절해진다.
시몽에게 가족이, 연인이, 개인적인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24시간 동안 그의 수술과 관련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모두에게는 타인과 비교할 수 없는 삶이 있고 아마도 죽음이 있을 것이다. 세상 일이 그렇다.
2019년 무대에 올려진 후 두 번째라는 이 연극은 100분 동안 단 한 명의 배우만 나온다. (2019년의 나는 이 연극도 안 보고 뭘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실망이야, 나!) 그는 웃고, 웃게 만들고, 키스하고, 사랑하고, 절망한다. 저 정도의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로 윤나무 배우는 관객들을 완벽한 몰입으로 이끌었다. 무대 조명이 꺼지고 살짝 어색한 웃음을 올린 그가 인사할 때까지 나는 100분의 시간이 지나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급하게 프로필 검색을 해보니, 요즘은 티브이에 주로 얼굴을 보이는 듯하다(도통 티비 드라마는 보지 않아서 그의 출연작 중 내가 본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아쉽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이 연극이 막을 내리기 전에 다시 한번 극장을 찾을 생각이다. 생명과 죽음, 사람들의 관계를 곱씹기에 이보다 적합한 작품은 없다. 배우님 지치지 말고 계속 버텨 주세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