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리버

-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by 지안

찢어진 벽지와 전구가 나간 거실등, 헤진 소파와 그 위에 늘어진 천 조각, 아무렇게 펼쳐진 카펫과 두서없이 팽개쳐진 박스들이 놓인 곳이 이 연극의 무대다. 어디선가 급하게 도망쳐 나온 모양새다. 아들을 잃은 아니타가 초조하게 바깥을 주시하며 무대 위로 들어온다. 그리고 담배.


문으로 걸어 나간 아니타가 소리친다.


“들어와.”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집으로 들어온 데이비. 그들은 결국 합의한다. 살인 사건의 목격자인 데이비는 본 것을 그대로 말하고, 피살자의 어머니인 아니타는 그가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기로 한다. 쇼디치라이즈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 아니타의 아들 ‘빈센트 리버’의 죽음에 대해 두 사람은 ‘불공평하지 않게 거래하기’로. 그리고 황량하고 썰렁한 무대 위에서 이렇게 그들의 대화는 시작된다.


아니타가 머뭇거리는 데이비에게 오래된 농담을 전한다.


병원에 간 임산부가 애를 낳았는데, 산파가 아무 말없이 애를 데리고 가 버렸대. 잠시 후 의사가 나타나 아이를 보여주는데, 커다란 귀만 있었다지 뭐니. 놀란 임산부가 울기 시작했지. 의사가 더 엄청난 사실을 말했어. 이 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이 연극은 영국의 극작가 필립 라이들리의 작품이다. 2000년 영국 무대에 올려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연극이다. 영국인들이 21년 전에 했던 고민을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동성애’에 관한 한 우리는 상당히 배타적이다. 하지만 꼭 ‘동성애’에 국한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신이 막연하게 못마땅한 어떤 것이 있다면 한 번쯤 이 연극을 보며 생각해도 좋다.


예를 들어, 극 중 17세인 데이비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꺼림칙하신 분들은 잠깐 판단을 보류해도 좋겠다. 일단 판단을 멈추고, 어떤 불편함을 잠깐 접어 놓고, 두 배우가 표현하는 슬픔에 동참해 보기를 요청한다. 이 극이 끝날 때까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귀만 남았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인간이란, 살해당한 사람이 발견된 곳이 ‘호모들의 집합 장소’였기 때문에 ‘동성애자 피살’로만 떠드는 언론이 있는 곳과 같다. 내 아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배척해서 쫓아버리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듣지 못하는 귀’로 가득한 공간에서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내 이익과 합당하지 않다는 까닭으로, 그저 감정적으로 내가 싫은 기분이라는 이유로 편하게 우리는 어떤 일을 혐오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을 경멸한다.


스피노자는 ‘경멸’을 ‘다른 사람을 정당한 것 이하로 평가하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당연히 ‘경멸받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다뤄져도 좋은 사람’이 된다. 폭력을 행사해도, 뒤에서 수군거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과 완벽하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여긴다.




굳이 입장을 바꿔 보지 않아도 전해질만큼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충분히 ‘폭력적’이다. 하지만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란 ‘신경 쓰여도 티 내지 말자’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고통스럽다.


상대가 ‘아들을 잃은 어머니’라고 해도,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이런 종류의 ‘혐오’ 앞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다. 이런 종류의 혐오는 왜 생겨나는가? 그리고 어떤 이유로 ‘정당성’을 획득하는가?



52살의, 아들을 잃은 아니타와 17세의 데이비가 이 연극에 출연하는 전부다. 여유 있을 것 같은 무대는 두 사람의 티키타카와 감추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감추고 싶지 않았던 진실 만으로 충분히 긴장된다. 창과 방패를 순간순간 바꿔 쥐어야 하는 장수처럼, 두 사람은 시종일관 공격과 수비를 바꿔가며 서로의 빈틈을 노린다. 공격을 위한 것은 아니다. 고백을 위한, 참회를 위한 노림수다.


하지만 과연 그들에게는 어떤 죄가 있을까? 쉽고 간단하고 단순하게 누군가를 재단하여 평가한 후 마음대로 던진 돌이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돌에 희생된 사람은 결국 그를 사랑했던 또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이런 혐오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기분에 따라,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내 안의 선입견들은 그것이 향하는 대상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칼날이 되어 박히는 것일까? 연극이 끝난 후까지도 개운하지 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선입견과 편견, 혐오’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같은 무대, 시작보다 훨씬 어지럽고 정신없이 헝클어진 공간에서 극은 끝난다. 마치 우리 사회처럼. 갖가지 혐오와 선입견, 쉬운 판단, 거친 말들을 가진, 내가 딛고 서있는 이 땅 말이다.


아니타 역의 우미화 배우와는 사랑에 빠질 뻔했다. 아름답고 연약한, 상처 받았지만 강인한 주인공에 푹 빠지도록 해 주었다. 마지막 폭발하는 강승호 배우의 연기도 가슴 저렸다. 끝나고 마지막 장면이 매운, 그래서 끝까지 마음을 쓰게 하는 연극을 사랑한다. 이 연극이 내게는 그랬다. 빈스,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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