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을 기다리며

- 연우소극장

by 지안

무대 한 면에는 둥근 원통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바깥으로 가냘픈 난간과 그보다 더 형편없는 비닐 천막이 보인다. 줄지어 있는 생수병과 그걸 마시고 배출한 것을 모아 놓은 병들이 그곳에 인간이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울리지 않는 화분 몇 개는 최대한의 사치처럼 보인다. 걸려 있는 단 하나의 밧줄로 필요한 것이 올라온다. 그러니까 밧줄은 밥줄이기도 하고 생명줄이기도 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 먹지 못하면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이 연극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 했다고 한다. 제목에서부터 감이 오지만, 팸플릿에 명확하게 적혀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을 알고 있다면, 비록 본 적은 없더라도 결말은 알고 있을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끝없는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만 어찌 된 일인지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 더, 연극이 시작되면 에스트라공은 아픈 발 때문에 투덜거리며 신발을 벗으려고 애쓴다. 무대의 불이 켜지면 ‘누누’는 신발을 벗으려 기를 쓴다.


여기까지다. 이 연극이 <고도를 기다리며>에 빚진 부분은 딱 여기까지다. 부조리극, 난해한 대사 같은 이유로 악명이 높은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한 연극일 것이라고 속단하지는 마시라. 이 극은 그보다는 훨씬 구체적이고 친절하다. 출연진도 많다(무려 다섯 명이다).




두 주인공 ‘누누’와 ‘나나’는 70M 높이의 굴뚝에 올라가 농성 중인 노동자다. 익숙하지 않은가? 지금 이 시간에도 국회나 특정 사업장에서 농성 중인 사람들이 있다. 작년에는 도로공사의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여성 노동자들이 톨게이트 위로 올라갔다. 형제 복지원 관련 법안 통과를 요구하는 피해자들은 국회가 보이는 탑 위로 올라갔다.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쌍용차 직원들이 오른 것도 굴뚝이고, 재개발 보상 대책을 반발하던 용산 철거민들이 오른 것도 건물 꼭대기였다.


거대한 기업이나 국가 권력에 대항할 때 개인이 던질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몸’ 그러니까 ‘생명’ 뿐이다. 그러나 오지 않는 ‘굴뚝 씨’처럼 이들의 요구에 대한 답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가? 당신이 우리나라 상위 10%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농부’였던 시절, 도시의 삶에 지친 사람들은 시골로 돌아갔다. 땅이 있는 한 내 한입 풀칠할 것은 마련할 수 있었다. 부유해질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살아남을 수’는 있었던 거다.




산업 혁명이 일어났고, 농사짓던 토지는 양을 키우는 목초지로 변했다. 더 이상 땅에서 사람이 먹을 식량을 마음대로 얻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은 도시로 나와 자신의 ‘밥줄’을, ‘생명줄’을 찾아야만 했다. 어느덧 굴뚝 위까지 쫓겨난 그들은 낭떠러지보다 깊은 아래를 바라보며 두려움을 느낀다.


“어떻게 내려가지?” 누누가 묻는다.


“사다리를 타고.” 나나가 대답한다.


“사다리는 어디 있어?” 누누가 다시 묻는다.


“없어.”


청소부는 ‘청소 로봇’으로 대체된다 ‘굴뚝 청소는 매우 위험한 일이라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청소부는 사라졌다. 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는 행복해졌을까? 이제 그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밥을 마련하고 있을까?


현실에 빗대어 보자면, 지금 자동차의 대세는 ‘전기 자동차’다. 우리가 사는 동안 지구를 박살내고 싶지 않다면, 선택해야 하는 많은 일 중의 하나다. 그런데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자동차로 바뀌면서 사용되는 부품의 70퍼센트는 사라진다고 한다. 전기차를 타는 것은 환경을 생각한다면 좋은 일이다. 즉 ‘내연기관차는 위험한 것이라 인간이 타서는 안 되는 차’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그 부품을 만들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현실의 나는 부품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일자리가 로봇으로 대체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즉 그들의 일은 나의 일이다




이런 줄거리이다 보니 이 연극, 즐겁지 않다. 무릇 공포 영화는 무서운 법이고, 귀신 영화는 소름이 돋는 법이다. 굴뚝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에 관한 연극이 웃기고 즐거울 리가 없다. 하지만 ‘재미’는 있다. ‘나나’와 ‘누누’의 대사는 잘 짜인 랩처럼 들리고, ‘성자가 된 청소부’나 ‘미소’의 대사와 몸짓도 웃음을 터트리기에 충분하다. ‘이소’의 급식체 대사는 음…… 뭐랄까….. 정말 급식이들이 들었다면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릴 오래된 구어체이긴 하지만, 최대한 ‘젊은이’를 표현해보고 싶은 각본가의 고뇌가 느껴졌다. ㅎㅎ


20년 넘게 ‘노동자’인 나로서는 연극의 대사 하나하나가 귀에 박혔다. ‘짐승은 만나면 서로를 잡아먹지만, 사람만이 사람을 무시할 수 있다’는 대사에는 그야말로 뼈를 때리는 아픔이 느껴졌다. ‘연대’를 해도 넘기 어려운 풍파를 우리는 서로를 ‘무시’하며 걸어 나간다. 안전을 위해서는 두 사람이 함께 일을 해야 하지만, 눈앞의 이익 때문에 혼자 일을 하면서도 ‘청소할 수 있는 굴뚝이 있으니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고 위안을 삼는 청소부와 내가 다를 것은 뭔가.


작은 무대이다 보니 배우의 숨소리까지 전달된다. 누구 하나 빠질 것 없는 연기력으로 웃음과 찡함을 준다. 마지막 누누의 대사는 가슴 아프다. 하지만 또 작은 공연장이다 보니, 덥다. 소음 때문에 내부 에어컨을 틀지 못해서 무대의 열기와는 다른 제2의 열기가 느껴진다. 옷은 시원하게, 가능하다면 소리 안나는 바람 나오는 기구 하나쯤 가지고 공연장을 찾으시길 권한다. 당신이 상위 10%에 드는 자본가가 아니시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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