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벌써 이렇게 더울 일인가 싶게 높은 기온이 연일 계속된다. 늘어지고, 만사가 귀찮고, 복잡한 것이 딱 싫어지는 계절이다. 이런 계절이면 영화관에는 ‘여고괴담’류의 공포물이나 ‘분노의 질주’ 같은 액션물이 자리를 잡는다. 뇌라도 깔끔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여름을 보내고 있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면 너무 나간 것인가? 그렇다면 연극에도 이런 작품이 있지 않을까? 가만히 있어도 적당히 소름 돋게 해 주고, 굳이 고뇌하지 않아도 알아서 결말을 향해 칙칙폭폭 나아가 주는 연극? 그러니까 이 연극, 크리미널처럼?
입장하면 구식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오래전 뉴스를 볼 수 있다. 저런 텔레비전은 어디서 구했지?라는 감탄을 내뱉을 무렵 화면에는 2002년에서 2005년 사이의 뉴스가 흘러나온다. 상당히 큰 소리로 틀어 놓았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가능하면 뉴스 내용을 머릿속에 살짝 적셔주는 것이 좋다. 어차피 90분 후에는 필요 없어질 내용이다. 다만 90분 간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비가 예상된다는 날씨 정보를 끝으로 화면은 종료된다.
비 소리가 가득한 어두운 무대는 비명과 외침으로 가득 찬다. 나처럼 경증의 폐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시간이다(진심으로 뛰쳐나가야 하나 고민했다. 이런 주제에 연극을 잘도 보러 다닌다). 인고의 시간이 지난 후(5분 남짓 되었던 것 같다) 불이 켜지면 무대에는 시체 1구와 4명의 당황한 남녀가 있다. 살아 있는 4명의 사람은 검사 강철기, 서울대 학생 이진오, 기자 한수민, 정신과 의사 최도영이다(혹시 이 글을 읽고 연극을 보러 가시는 분들이 있다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정보를 담고자 출연진의 이름을 밝혔다! 왜냐고? 안 알랴줌. 연극을 보시면 안다). 이들은 모두 납치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산장이었다.
밀실이 된 산장 안에 갇힌 사람들은 당연히 그곳을 탈출하려고 한다. 때마침 10분이 맞춰진 타이머도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쩐지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속 인물들 같다. 소설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인디언 섬에 초대받은 손님 8명과 하인 2명, 모두 10명의 인물이 나온다. 때마침 폭풍이 시작되어 아무도 나갈 수 없게 된 섬.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죄를 밝히고 그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뭐 이런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산장에 납치되어 온 사람들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이 연극은 2016년부터 공연되어 온 대학로 장수 연극 중 하나다. 지금은 무려 시즌4다. 이렇게 장기 상영 중인 연극들의 미덕은 가벼운 가격에 티켓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나도 이커머스 사이트에서 할인 가격에 표를 구했다. 여름이니까). 악덕은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로 케바케라는 것이다. 신인급 배우들의 연기 연습장이구나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회차도 있고, 알려진 얼굴은 아니지만 멋지구나 감탄하게 되는 무대도 있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경력직’만 뽑는다면 신입은 어디에서 일을 배워야 할까? 그런 너그러운 마음으로 무대를 지켜봐 주시길 바란다.
게다가 이 연극에는 가볍게 소비하고 끝내기에는 아까운 요소가 많다. 중간중간 손뼉을 치고 싶을 정도로 잘 짜인 구성으로 범인을 추리해보는 묘미도 있다. 연극이 끝난 뒤 묵직하게 남는 여운은 덤이다.
산장의 거실로 꾸며진 무대 정면에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이라는 그림이 걸려있다. 대사에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소품인데 관객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의 머리 사진으로 걸어 두었다. 관람에 도움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