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분장실>

-대학로 자유극장

by 지안

졸업 후 20년이 넘도록 직장인인 나는 ‘직장인의 설움’에 대해서는 꽤 공감한다. 그것이 ‘은행에 다니는 박 과장’의 고통이건 ‘무역회사에 다니는 최 부장’의 고뇌이건 ‘IT기업에 다니는 김 사원’의 슬픔이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공감 가는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이에 반해 ‘고등학교 때 데뷔한 아이돌’이나 ‘스무 살에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어 줄곧 바쁘게 살아온 배우’,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재벌’인 사람의 인생을 짐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연극 <분장실>에는 4명의 여배우(‘여배우’라는 단어가 좀 시대착오적이긴 하지만, 이 연극은 ‘여성 배우 4인’과 ‘남성 배우 4인’의 연극이 나뉘어 무대에 올라갈 예정이라 ‘여배우’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가 나온다. 아마도 7-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덕분에 연극과 데모가 생활이었던 배우 A,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 홀로 상경해 배우의 꿈을 키웠던 배우 B, 40대에도 여전히 18세 니나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 C, 그리고 지금 C의 프롬프터인 젊은 배우 D가 그들이다.


A는 연극의 이론에 관해 아는 것은 많지만 오랜 시간 프롬프터만 맡아 무대에 오른 적은 거의 없다. B도 처지는 비슷한데 그에 더해 남자 문제로 언제나 힘들다. C는 연극과 티브이를 오갈 정도로 잘 나가는 배우이지만 엉망인 집안 사정과 나이 먹고 초라해지는 스스로로 인해 고통받는다. D는 무대에 오르기를 기다리며 노력하고 연습하지만 도무지 기회가 보이지 않는다. 40대의 배우가 아직도 18세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D에게 차례가 돌아오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이런 그들이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라는 작품을 연기하며 스스로 고뇌하고, 서로를 질투한다. 나 같은 ‘평생 직장인’이 ‘배우’의 속마음을 엿볼 기회다. 과연 가능할까?




그런데 잠깐, 프롬프터. 프롬프터? 무대 아래 화면으로 고정되어 있는 프롬프터가 아니라 사람의 말로 전하는 프롬프터라고? 흠. 그러니까 이 연극은 무려 1977년 초연된 작품이다. 일본의 극작가 ‘시미즈 쿠니오’의 대표작이다. 일본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종종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희곡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준비된 프롬프터’를 무대 뒤에 세웠다. 대사를 잊을 경우 관객은 모르게, 배우만 들리는 성량으로 알려준다. 물론 지금은 모니터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맞지 않는 설정이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부분이라 연극의 에피소드 대부분을 현재에 맞게 갈아엎었음에도 ‘프롬프터’라는 설정은 살아남았다. 각색이 훌륭해서 연극의 시작부터 관객들이 소소한 웃음을 터트린다. A와 B의 티키타카가 중요한데, A역의 서이숙 배우와 B역의 배종옥 배우의 합이 잘 맞아서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웃음을 준다. C역의 우정원 배우의 독백은 압권이어서 “니나 역도 그냥 젊으면 좋다, 이게 아니고 축적이 필요한 거야. 여러 경험이 쌓여서 얻어지는 축적” 같은 대사는 극이 끝난 한참 후까지도 머릿속을 맴돈다.




그러고 보면 <분장실> 배우들의 삶과 우리 삶이 그다지 다르지는 않다. 성공가도를 힘차게 달리고 있는 것 같은 사람도 커가는 경쟁자와 나이 먹는 자신을 바라보며 스트레스를 받고, 단 한 번도 잘 나가보지 못한 누군가는 앞서서 달리는 사람을 보며 시기하고 질투하지만 나름대로의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결국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많이 준비한 사람일까? 오래 기다린 사람? 아니, 분장실을 떠나 무대로 오르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아닐까? 무대에 서겠다는, 마지막 한 발을 내딛겠다는 용기가 없이는 누구도 그곳에 설 수 없다. 우리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무엇을 하고 싶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결국 마지막 그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그 한걸음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해도 그 일을 해낼 수 없다. “복권에 당첨되려면 그전에 복권을 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연극에는 반전이 있다. 그러니 관람하려는 분들은 따로 줄거리 공부를 하지 말고 가시길.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나 <세자매>를 몰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 나 역시 스포일러를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직접 현장에 가서, 정신없이 깔깔대며 극을 즐기시기를 권한다. 9월에 시작된다는 ‘남자 배우 버전의 분장실’이 매우 기다려지게 만드는 멋진 ‘여배우들의 분장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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