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치의 영화는 몰래 본다. 누군가 최애 영화 리스트를 물어도 그의 영화들을 꼽지는 않는다. <소림축구>와 <쿵푸허슬>, <식신>뿐 아니라 열댓 편의 영화를 더 챙겨본 것도 굳이 말하지 않는다.
<베를린>이나 <베테랑>, <부당거래> 같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 엄지 척을 하지만 사실 숨겨진 명작은 <다찌마와리>라고 내심 생각한다. 물론 <다찌마와리>는 혼자 봤다. 뜻밖의 곳에서 무차별적으로 낄낄대는 나를 지인에게 들킬 마음은 없다. 누군가와 함께 본다면 '와, 얘는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라고 타인의 감춰진 감성을 관찰할 수 있어 좋기는 하겠지만...
이런 것을 B급 감성이라고 부른다면, 좋다. 내게는 B급 감성이 있고, 드러내 보이지 않을 뿐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사실 열광한다. 유치해? 뭐 어때! 재미있잖아?! 방심하다 한방 들어온 어이없는 상황에 혼자 정신없이 큭큭대는 나란 사람은 참 곤란하지만 말이다.
<홀연했던 사나이>는 이런 영화들과 비슷한 결의 뮤지컬이다.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으나 현재는 좌절만 가득한 인생을 살고 있는 승돌이 처음 꿈을 품게 되었던 과거 시점으로 돌아가면서 극이 시작된다.
때는 1987년. 거리는 독재권력 타도를 원하는 외침과 그들의 입을 막으려는 최루탄 연기로 가득하다.
승돌의 엄마 홍미희는 아가씨들을 고용하는 여느 '다방'과는 달리 오직 '차'만 파는 샛별다방을 운영한다. '아가씨가 배달하는 커피'를 파는 옆 다방 꽃님이와 중국집 배달일을 하는 고만태, 시류에 걸맞게 데모로 바쁜 황태일 선생님은 샛별다방의 단골이다. 그리고 이들의 앞에 '홀연했던 사나이'가 나타나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B급 감성의 시작은 일단 사나이의 복장이다. 세상 허세를 모두 모은 것 같은 옷을 입은 그는 오글거리는 대사와 노래를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고 해치운다. 기존의 정극에서 보던 박민성 배우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쯤 되면 한번 해보자는 건가?" 하는 마음으로 정신없이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손유동 배우의 풋풋한 매력은 익히 알고 있지만, 조은진 배우의 노래에는 눈이 번쩍 떠진다.
'허세'에 좀 힘을 넣어 '기세'로 만들겠다는 이 '홀연했던 사나이'는 승돌에게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품게 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뮤지컬은 '꿈'에 대해, '팍팍한 삶 속에서 꿈을 좇는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꿈이 이루어질까? 설마. 그래도 꿈을 가져야 하나? 모르지. 하지만 꿈을 버리면 또 달라지는 게 있나? 사는데 도움은 좀 될까? 인터미션 없이 110분 동안 진행되는 이 뮤지컬은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게도 꿈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원고료 없는 브런치에 이렇게 글을 쓰지도 않을것이다. '나 그거 완전 잘 해!'라는 '허세'를 '기세'로 바꾸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다.
이제는 꿈을 슬슬 놓아줘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관람해도 좋은 뮤지컬이다. 그 외 나처럼 B급 감성을 감추느라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늦기 전에 뛰어가기 바란다. 대부분 극장에는 '소프라노 웃음'이 흔한데, 이곳에는 '저음의 중후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성팬이 훨씬 많은 주성치 영화들처럼 말이다. 자신의 취향을 돌아보시고, 아우팅 없이 조용히 즐겨도 좋을 그런 뮤지컬이다. 아, 그 사나이 멋지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