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들의 연기한 [분장실 VER1]과는 같은 듯 다른 작품이다. 여배우들의 작품을 [분장실 No.1]이라고, 남배우들의 무대를 [분장실 No.2]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분장실 VER1]을 관람하지 않았다고 해서 [분장실 VER2]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아니지만 [분장실 VER1]을 봤던 관객이라면 그곳에서 사용된 트릭과 반전을 이미 알고 있다. 반전이 유효한 횟수는 딱 한 번이다.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를 알고 보는 '식스센스'는 떡 없는 떡볶이이고 버터가 들어가지 않은 크루아상이다.
그렇다면 [분장실 VER2]는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까.
[분장실 VER1]처럼 [분장실 VER2]의 무대도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 공연이 진행 중인 '분장실'이고 4명의 배우가 나온다. '트레플레예프 '를 연기하는 배우 C는 대사가 입에 붙지 않아 힘겨워한다. 매번 같은 대사를 틀리는 것도, 드라마에 출연할 예정이라는 것도 [분장실 VER1]과 동일하다. 분장실에 머물고 있는 유령 A와 B가 그 과정을 지켜본다.
VER1에서 반전으로 사용된 "넌 우리가 보여?"는 더 이상 관객에게 놀라움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VER2는 시작부터 A와 B가 유령이라는 점을 관객에게 선포한다. 배우 A, B, D가 배역보다는 '프롬프터'를 주로 했다는 설정 역시 삭제했다.
'프롬프터'라는 설정을 삭제하고 보니 C와 D의 관계도 바뀌었다. 배우 A는 친일파 집안에서 자라며 부끄러움을 느끼던 동경 유학생이다. 배우 B는 이념의 격전장이던 1950-60년대를 맨 몸으로 관통한 인물이다. 배우 C는 온갖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며 기어코 주연이 되었지만 현실은 아직도 녹록하지 않다. 배우 D는 아는 것은 많지만 무대 공포증이 생겨 공연 직전 도망친 인물이다. 배우 C와 D는 동창생이며, 배우 D는 이제 공포증을 이겨냈다며 배우 C에게 배역을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린다.
즉 대본의 큰 틀은 시미즈 쿠니오의 [분장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분장실 VER1]에서 효과 만점이던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변수가 극의 흐름을 조금 흔들어 놓았다. 과연 이 변수는 극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극이 시작되면 네 명의 배우가 푸시킨의 시를 읊으며 무대 위로 등장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서러운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왜 슬퍼하는가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해지리니
라는 시 말이다. 이 연극의 소개글에는 "흘러가는 것은 머지않아 그립다"는 말이 적혀 있다. [분장실 VER1]이 '용기 내어 무대에 올라서는 사람 만이 배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했다면 [분장실 VER2]는 "흘러가는 것은 머지않아 그립다"를 주제로 잡았다. 그러니 지금의 힘겨움을 참고 견디며 '축적'의 시간으로 사용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배우 A와 B의 티키타카는 여전하다. 특히 정원영 배우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소소한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유령임을 선포해 버렸으니, 이들이 정체를 드러내며 가득 채워졌을 중반부가 볼품없이 헐렁해져 버렸다.
[분장실 VER1]의 배우 C가 짊어진 손에 잡힐 것 같은 고통들을 [분장실 VER2]에서는 지워버렸다. 덕분에 배우 C를 연기한 김바다 배우의 연기가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저 정도는 힘들지 않아?' 하는 시니컬한 마음이 되어 버린다. 배우 A가 이야기하는 "흘러가는 것은 머지않아 그립다"는 말을 그래서 '응,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마음으로 듣게 된다.
동일한 연극을 여성 버전과 남성 버전으로 올리겠다는 시도는 좋았다. 시도가 좋다고 결과도 멋있었다면 그거야 말로 최고였겠지만 이 연극에 그런 박수를 보내기엔 아쉬운 면이 많다. [분장실 VER1]을 보지 않고 [분장실 VER2]만 본 관객이라면 좀 낭패스러울 것도 같다.
흘러가는 것은 머지않아 그립다. 과연 그럴까? 서러운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까? 나는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