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

-플러스 시어터

by 지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에는 사후 세계로 가기 전 머무는 '림보'라는 곳이 등장한다. 림보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망자들은 살면서 가장 소중했던 한 장면을 선택해야 한다.


림보에 머물며 망자들을 돕는 존재들도 있다. 주인공 모치즈키도 그들 중 하나다. 모치즈키는 과거 망자로 림보에 머무는 동안 선택을 하지 못했다. 단 한순간의 소중한 장면도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는 사후 세계로 건너갈 수 없었다.


모치즈키의 동료들 역시 사정은 비슷비슷하다. 살면서 소중한 기억을 가질 수 없었던, 혹은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고, 그런 이유로 그들은 림보를 떠나지 못했다. 그들은 망자들이 기억을 선택하도록 돕기도 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조언하며 망자들의 소중한 기억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든다. 망자들은 자신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사후 세계로 건너간다. 행복한 기억이란 미련 많고, 한 많은 이승의 귀신이 맑은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는 KEY다.




그래서일까, 쿠로이 저택에 살고 있는(?) 지박령 옥희는 자신의 '행복한 기억'을 재현할 수 있다면 귀신의 처지를 벗어나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그 기억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기억 속에는 옥희 말고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옥희는 역할을 맡아 줄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옥희가 머무는 곳은 림보가 아니다. 누구도 옥희를 보지도, 그녀의 말을 듣지도 못한다. 오직 옥희의 존재를 느끼고 두려워할 뿐이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점점 심술궂고 고약한 귀신이 될 뿐이다.


그때 옥희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났다. 시계 수리공인 해웅이다.


옥희의 말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옥희를 볼 수도, 다른 귀신들을 볼 수도, 그들의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이거야 원, 림보가 필요 없다. 이제 해웅만 있다면, 해웅이 이들의 기억을 재현해주기만 한다면 이들 귀신들은 모두 행복하게 저세상으로 갈 수 있다. 브라보, 원더풀이다.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제목을 보고 일본 원작의 뮤지컬이라고 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하지만 배경이 일제 강점기였을 뿐 우리 작가와 연출가들이 만든 작품이다. 2021년 2월 초연 후 두 번째 상연이라고 한다. '우리 작가가 굳이 왜 저런 제목을 선택했을까?'라는 궁금증으로 찾아본 작품이다. 출연진은커녕 시놉시스도 모르고 극장을 찾아갔는데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일제강점기는 선악이 분명한 시대다. 좋은 놈과 나쁜 놈의 구별이 뚜렷하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좋은 사람은 행복하면 되고, 나쁜 놈은 벌을 받아야 한다. 끝! 당연히 극이 시작될 때 결말까지 예상이 가능하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쿠로이 저택은 옥희의 추억이 담긴 저택이고 시대의 아픔이 담겨 있는 집이다. 저택의 이름부터 옥희의 추억이 담겨 있다. 극을 보고 확인하시기 바란다. 멋진 바다 전망을 가진 이 저택은 귀신 나오는 집으로 이제는 더욱 유명해져서 리조트 공사를 하려는 인부들을 모으기도 어려울 정도다. 막강 옥희 파워다.


이런 옥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다. 그저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가는 것.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


뭔가가 잘못됐다. 뭘까?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기억이 의외로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모치즈키가 다른 사람의 기억 속 옛 연인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잊고 지냈던 것처럼. 정말 소중한 것들은, 진정 사무치는 기억은 무의식의 저 아래 깊숙이 틀어박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느 날, 날카로운 톱니처럼 수면 위로 떠올라 상처를 헤집어 놓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하는 것 아닐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글로 써 놓고 보니 엄청나게 진중한 뮤지컬 같지만, 이 작품 상당히 가볍고 재미있다. 특히 네 명의 귀신들은(그래 봐야 다들 멀티로 출연하시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맛도 상당하다) 극의 흐름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극의 결말은 뻔하지만 종착역까지 이르는 길은 그렇지 않다. 자잘한 재미와 흥이 넘친다. 신나게 낄낄거리다 마음 한쪽에 뭔가가 살짝 내려앉는 느낌이 드는 그런 작품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행복한 기억일까?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일에 대한 정리일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미련을 놓고 이승을 떠날 수 있을까?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봐도 좋을 뮤지컬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모두가 행복한, 스산한 겨울에 마음 따뜻해지는 해피엔딩 뮤지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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