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다

- 선돌극장

by 지안
내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무대는 마크 로스코 풍의 그림이 걸려 있는 잘 정돈된 거실이다. 한쪽에는 크리스마스트리도 서 있다. 그런 것들이 어울리는 시간이다. 12월, 성탄절, 연말, 그 정도쯤. 깔끔한 거실에 어울리지 않게 테이블 위는 지저분하다.



불이 켜지면 네 명의 여자가 관객석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테이블 위가 지저분했던 이유도 밝혀진다. 뭔가에 대단히 집중한 표정으로 훌쩍거리는 그녀들이 사용하고 던진 휴지 같은 것으로 테이블이 너저분해진 것이다. 그들은 오래된 멜로 영화를 보는 중이다. 30대 중반인 그녀들의 이름은 동지, 청명, 신정, 상강이다. 그녀들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가 수선화가 꽂힌 화병을 들고 나오며 잔소리를 시작한다.


“귀신 나오겠다, 이년들아. 테이블이나 치워.”


험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녀의 이름은 말복이다. 지금은 음식을 만드는 중이라 복장이 허름하지만 실은 잘 나가는 웨딩드레스 사업가다. 오늘 말복은 어렸을 때부터 잘 알던 조카의 친구들과 함께 조카의 1주기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참이다. 모름지기 제사에는 귀신이 나와줘야 정석이다. 그러니 잘못된 일이 무엇인가. 가만, 말복의 말투며 차림새가 잘못된 것처럼 보이긴 한다. 말복은 트랜스젠더다.




한 명의 트랜스젠더와 네 명의 30대 여성. 얼핏 생각하면 트랜스젠더 쪽의 사정이 훨씬 드라마틱하고 놀라움의 연속일 것 같다. ‘헤드윅’의 일생으로는 뮤지컬 한 편이 나오지 않는가? 하지만 거리의 누군가를 붙들어도 사연 없는 사람이 없듯이 이들 다섯 명은 각자 말 못 할 과거와 현재로 힘겨워하고 있다. 겉으로 완벽하게 보이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문제될 것이 없다. 모두 한 무더기의 상처를 끌어안은 채 버둥거리고 있다. 마치 당신처럼, 그리고 마치 내 삶처럼 말이다.


동지는 ‘잘 안 팔리는’ 책을 쓰는 작가다. 일단 밥 먹고 사는 일이 문제다. 신정은 등장부터 뾰족하다.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상사를 ‘모시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모가 나고 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상강의 처지는 그중 나아 보인다. 직업이 ‘의사’다. 하지만 이혼한 전 남편과 아이 일로 머리가 복잡하다. 그렇다면 청명은 좀 낫지 않을까?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둔 가정 주부인 청명은 그중 가장 문제없는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10년 이상 해 본 분들이라면 알 것이다. ‘평범한 가정주부’란 세상에 없다.


그러니까 이 연극의 네 명의 친구는 현실의 30대의 모습을 압축해 놓은 것 같은 사람들이다. 부모 잘 만나서 유산 많은 사람 빼고, 재능 많아서 뭐든 금손인 사람들 빼고, 로또 맞을 운도 없어 큰돈 못 만지고 평생 자신의 노동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만 모으다 보면 이런 사람들만 남게 된다. 잘 안 나가는 프리랜서나 직장인, 겉만 번지르르한 전문직이나 마음 한쪽이 뚫린 주부. 이제 여기에 ‘딸이 있었던’ 트랜스젠더를 얹는다. 불행의 종합세트처럼 보인다.




제사를 지내러 모인 사람들은 늦은 밤이 되기도 전 숨겨두었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진다. 나머지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놀라운 비밀들이다.


오래되고 추억이 많다는 이유로 가깝게 여겼지만 결국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그것이 제일 가까운 친구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극 중 동지의 말처럼 “내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이들처럼 이야기해야 한다. 쓸모 있는 이야기라도 지저분한 이야기라도 추억에 젖은 이야기라도 생뚱맞은 이야기라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결코 완벽하게 타인의 마음을 혹을 상태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함께 ‘살아지고’,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도 마냥 무겁지 않다.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동지, 청명, 신정, 상강의 이야기는 한순간 ‘풉’하고 웃음이 나올 때도 있고, 이따금 눈물이 맺힐 때도 있다. 우리 사는 이야기가 다 그렇듯.




이 극은 불이 켜지기 전 내레이션이 먼저 나온다. 처음뿐 아니라 중간중간에도 내레이션이 삽입된다. 처음에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극에 몰입하는데 상당히 방해가 된다. 툭 튀어나온 내레이션이 “존재하지도 못한 존재는 어떤 기억을 지니고 돌아갔을까” 같은 문어체 독백을 쏟아내니 극에 푹 잠겨 있던 마음이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순식간에 현실로 소환되는 것 같은 효과가 있다. 후반부 목소리의 정체가 밝혀지지만, 과연 필요한 장치였는지는 의심스럽다. 자막 같은 것으로 대체될 수는 없었을까? 혹은 극 중 다른 배우들의 언어처럼 구어체로 다듬을 방법은 없었을까.



우리는 직접적으로 건네진 말에도 위로를 받지만 다른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는다. 30대 후반이란 묘한 나이다. 생각해보면 그 시기는 ‘더 이상 젊지도, 새롭게 뭔가를 할 시기도 아닌’것처럼 생각되었다(지나고 생각하면 상당히 젊고,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다! ㅋㅋ). 그럴 때 나의 삶과 똑 닮은 동지, 청명, 신정, 상강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를 얻어보는 것을 어떨까. 나의 비밀이 세어나갈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위안만 얻어오면 된다.


쉬운 삶은 없다. 다만 그것을 함께 바라봐 주는 눈빛이 있다는 사실에 힘과 위안을 얻을 수는 있다. 연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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