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국립정동극장

by 지안

‘내가 다른 건 부족해도 이해력이나 문해력은 좀 괜찮은 것 같아’라는 근자감이 생길 때면 후다닥 꺼내 보며 반성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글 중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언어는 하나의 미로다. 당신이 어떤 한 측면으로부터 오면, 당신은 길을 훤히 안다: 당신이 다른 한 측면으로부터 그 동일한 자리에 오면, 당신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20세기 최고의 천재라는 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결국 ‘미로밖에’되지 않는 언어를 붙들고 서로를 이해하겠다고 바둥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를 빼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우리에게는 타인을 제대로 이해할 방법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닐까?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타인을 이해할 방법을, 혹은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고 시끄러운 말들 사이로 불쑥 묻는다. 쏟아지는 말과 잠시 찾아오는 침묵 사이에서 우리는 답을 구해야 한다.




무대는 부엌과 연결된 커다란 거실이다. 불이 켜지면 단란해 보이는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언어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무릇 대화란 논쟁으로 끝내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다. 추리소설 작가인 어머니 베스는 그런 남편을 지긋지긋해하지만 직업이 작가인 사람답게 언어 문제에는 할 말이 많다. 게다가 이 집에는 언어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 큰 아들 다니엘이 있다. 여러 가지 문제를 잔뜩 끌어안고 독립할 나이가 훨씬 지나서도 부모에게 얹혀살고 있다. 오페라 가수 지망생인 딸 루스도 있다. 딸 역시 독립할 나이가 지났기 때문에 크리스토퍼는 남매에게 집을 나가 독립하라며 으르렁거린다.


시끄러운 식탁에서 유난히 조용한 사람은 막내 빌리다.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듣지 못했다. 아들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소수자’ 틈에 섞이는 것을 반대하는 가족들 때문에 빌리는 타인의 입모양을 보고 대화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입모양이 보이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다.


“우리가 수화를 배우지 않은 이유는 귀찮아서가 아니야.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었어. 원칙에 어긋난다고. 우리는 네가 소수자들의 세계에 속하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어.”

듣지 못하는 아들을 향해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 가족은 라캉부터 섹스까지 갖은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말이 논쟁이지 이야기는 툭툭 끊어지고, 갈피를 잃고, 어딘가에서 길을 잃는다. 급기야 크리스토퍼는 중국어 공부를 하겠다며 노트북의 스피커를 켠다. 난장판이다.


문득 빌리가 말한다. 만나는 여자가 생겼다고. 점점 청력을 잃어가고 있는 수화통역사 실비아를 좋아한다고.


드디어 이 말 많은 가족의 식탁에 실비아가 초대된다. 할 말은 많지만 수화는 모르는 4명과 태어나서 한 번도 듣지 못한 한 사람, 점점 청력을 잃어가고 있어서 타인의 입모양을 보고 말하는 법을 아직 익히지 못한 한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까? 어떤 언어가 그들을 ‘가족’이란 이름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연극은 인터미션을 포함해 135분 동안 진행된다. 짧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지루할 틈 없이 말들이 쏟아진다. 그것으로 모자라서 말 뒤에 숨긴 본심이 자막 속에서 터져 나온다. 그렇다. 우리는 ‘입 밖에 내는 말’ 외에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말’까지 품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행간에 숨은 의미들까지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라는 수단을 가지고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아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겨울 눈발처럼 쌓인다. 답답하다.


그렇다고 가족들의 모습이 그런 답답함을 상쇄해줄 만큼 아름답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인종차별적 발언과 타인을 향한 무시들이 ‘가족 사이의 규칙’이라는 미명 아래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진다.


“폐쇄적인 게토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 집이에요. 평범하게 특이한 기모노. 어떤 공동체에도 속해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우리끼리만 모여 있기 때문이에요. 정신병자들, 자기들끼리 숨어 사는 공동체.”


결국 참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빌리의 말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가족이다.


하지만 당신이 비공식적인 장소에서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대화를 해 본 적이 있다면, 이 가족을 비난만 하기도 어렵다. 나 역시 그랬다.


거대한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대사들을 정확한 발음으로 내 귀에 퍼부어 준 모든 배우들의 역량에 감사한다. 특히 연약하지만 서서히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 빌리라는 역할은 이재균 배우가 아니면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의 손짓 하나까지 기억이 또렷하다.




언젠가 BTS의 노래 중 ‘흰 눈처럼 소복소복 넌 내 하루에 내려와’라는 가사 때문에 ‘소복소복’의 뜻을 묻는 아미들의 문의가 이어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의 언어에는 ‘소복소복’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소복소복 내리는 눈’에 대한 감정이 없을 리는 없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외국어를 번역하면서 적확한 우리말이 없어 고민하는 것은 번역가의 일상이라고 들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완벽하지 않은 언어를 안고 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니 알량한 몇 마디 말들로 타인을 판단하는 일은 멈춰야 한다.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나을 것은 없다. 입으로 내뱉는 말이 손으로 하는 언어보다 훌륭하다고 자만할 필요도 없다.


내가 멍청해질 때마다 들여다볼 수 있는 뜨거운 말씀들을 많이 남겨주신 비트겐슈타인의 말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나 외에 아무도 나에게 모자를 씌울 수 없듯이, 아무도 나를 위해 대신 생각해 줄 수는 없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나 외에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이 연극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지. 2시간 넘는 시간이 순간처럼 느껴지는 좋은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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