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단어를 ‘X=3이고, Y는 허수일 때, Z는 무한대임을 증명하라’처럼 기호가 난무하는 수학책 한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는 “자기, 날 얼마큼 사랑해? 증명해 봐.”와 같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로맨스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맞닥뜨릴 때도 있다.
내가 수학적 ‘증명’을 이해할 만한 뇌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인생 극 초반기(나는 인생의 9할을 수포자로 살고 있다)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 속 ‘증명’의 문제라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이해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무대는 시카고에 위치한 낡은 단독주택 뒤 뜰이다.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지붕이 달린 포치와 마당 가운데 놓여있고 집으로 드나드는 문이 보인다.
불이 켜지면 포치 구석 테이블에 피곤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캐서린이 보인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옷도 지저분하다. 무엇보다 정신 상태가 엉망이다. 자정을 넘기며 막 스물다섯 살 생일을 맞은 캐서린은 ‘나이먹음’에 대해, ‘아버지처럼 미쳐버릴지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두려워한다.
캐서린은 아버지를 돌보느라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수학’에 관해서만큼은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다. 도제식으로 교육받는 중세의 수공업자처럼 캐서린은 아버지에게서 수학을 배웠다. 그녀는 수학을 좋아하고, 계산하는 것을 사랑한다(인류는 여려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퍽 신기하다). 글을 배우기 전에 소수에 대한 것을 먼저 알았을 정도다(오 마이 갓!).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시시하다. 캐서린은 누구이며, 어쩌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까? 연극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천천히 내놓는다.
무대의 변화는 없다. 동일한 공간에 배우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5년의 시간이 흘러간다. 시간은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첫 장면에서 던져진 많은 질문들은 과거 4년 전, 3년 반 전의 상황을 알아야만 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어제로, 오늘 아침으로, 지금으로 순간순간 이동한다. 그러니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잠자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너무 복잡해 어느 순간 옆으로 밀어 놓았던 퍼즐이 일시에 맞춰지는 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2000년 미국에서 초연된 데이비드 어번(David Auburn)의 연극 ‘Proof’는 <뛰어난 수학자였지만 조현병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진 ‘존 내시(John Nash)에게 그의 재능을 물려받은 딸이 있었다면>이라는 가정을 기반으로 창작되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몇 번 무대에 올려진 작품으로, 이야기의 구조가 워낙 탄탄해서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수학계에서는 스물세 살 정도에 학술적 창의력이 절정에 이르고, 그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라는 공포감이 있거든요. 오십이 넘으면 고등학생들이나 가르쳐야 한다는 거죠.
스물여덟 살의 수학 강사 ‘해롤드’의 말처럼 케서린의 아버지 ‘로버트’는 이미 20대에 엄청난 수학적 업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내리막길이 시작되었고 정신에도 문제가 생겼다. 케서린은 사회생활도 학업도, 친구도 전부 포기한 채 5년 동안 아버지를 돌봤다. 4년 전에는 잠깐 회복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이후 로버트는 계속 나빠졌고, 악화되었고 그러다 며칠 전 사망해버린 것이다.
장례식을 위해 뉴욕에서 캐서린의 언니 클레어가 도착한다. 아버지의 마지막 제자였던 헤롤드는 혹시 남아있을지 모르는 마지막 연구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낡은 집을 드나든다. 캐서린에게 호감을 품고 있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주기에 그녀는 너무 지쳤다.
장례식이 끝난 후 마침내 ‘헤롤드를 사랑한다’고 믿게 된 캐서린은 그에게 ‘엄청난 수학적 증명’이 들어 있는 노트를 보여준다. 이 증명은 생전의 로버트가 한 작업일까? 캐서린의 주장대로 그녀 혼자 해 낸 결과물일까? 클레어와 헤롤드는 그 증명이 ‘캐서린이 한 것’ 임을 증명하라고 주장한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왜? 캐서린은 무엇을 위해 그것을 ‘증명’ 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그런 ‘증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등장인물은 넷이다. 그들 모두는 ‘두려움’을 안고 있다. 아버지는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겨우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 딸을 결국 집으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아버지였다. 딸 캐서린은 아버지의 재능과 함께 물려받았을지 모르는 ‘광기’를 두려워한다. 아버지를 돌보며 지나간 이십 대, 수학적 발견으로 찬란히 빛났어야 할 그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고스란히 날려버린 것이 아닌가 두려워한다. 헤롤드 역시 두렵다. 이미 삼십 대를 향하고 있는 그는 아무런 수학적 발견을 해내지 못하는 그저 그런 학자가 될까 봐 두렵다. 뉴욕에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언니 클레어는 동생마저 미쳐버릴까 봐 두렵다. 하지만 ‘두려움’없이 사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두려움에 휩싸인 인물들과 함께 이 연극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표현된다. 아버지와 딸의 사랑, 자매간의 사랑, 남녀의 사랑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된다. 악인은 없다. 그저 두려움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평범한 인생처럼 더 이기적인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 때문에 인생이 흔들리는 다른 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과정 속 여러 사람에게 상처받은 캐서린의 말이 그래서 더 가슴에 남는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의 그 잘난 친구들과 결정한 모든 결론은 그저 단서에 불과해요. 당신은 그냥 날 믿었어야 했어요.
“삶은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것은 우리들이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인생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를 믿는 것, 믿어주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