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깨어난다. 병원? 그런 것도 같다. 작은 침대가 놓여 있고, 수혈을 위한 피도 걸려 있다. 20대 중반의 남자는 그곳이 어딘지, 자신이 누구인지, 왜 그곳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단서는 그가 가지고 있던 가방,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노트뿐이다.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 의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는 깨어난 남자가 자살을 시도했으며 거의 성공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쓰는 남자에게 말한다.
"당신이 마주할 기억이 당신을 더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라고.......
세상 사람 모두는 아니겠지만, 인류 중 일부는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과음으로 인한 기억 삭제. 그렇게 될 때까지 마신 이후라면 깨어났을 때 신체적 고통도 상당하지만, 그보다 마음을 졸아붙게 만드는 것은 '내가 마주할 기억'이다. 그 술자리에 있던 누군가의 전언으로 들려오는 이야기는 확실하게 '나를 더 힘들게'할 수 있다.
물론 이 연극 [인사이드]는 이런 가벼운 농담이 아니다. 자기 안에 몇 개의 인격이 공존하고 있는 '다중 인격'을 가진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연극의 소개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2000년 12월 21일, 5명의 소녀들을 무참히 살해한 오필리어 살인범 검거 2001년 8월 11일 오필리어 살인범 첫 공판에서 다중 인격 주장 해리성 정체감 장애 정말 사실일까 학계 논란
즉, 깨어난 남자는 5명의 소녀들을 살해한 살인범이다(이 정도는 스포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자신 안에(인사이드) 여러 명의 인격이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문장은 조금 스포로군요!)
어차피 여러 명이 살고 있는 중이니, 남자가 기억을 유지하고 하든, 그렇지 못한 상태이든 상관없이 내면의 인격들은 튀어나와 각자의 이야기를 떠든다. 관객은 그들의 이야기를 조합해서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복원해야 한다. 이 남자는 왜 죽으려 한 것인지, 그는 누구인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술 마시고 기억이 삭제된 순간에 저지른 잘못이 범죄인 것처럼 (음주 같은 것을 이유로 죄를 경감한다거나, 술 먹고 한 일은 괜찮다고 말하는 사회 일각의 분위기를 극혐 하는 편입니다) 남자 안의 다른 인격이 저지른 범죄도 결국 남자의 죄다. 다만 관객은 어떤 과정과 계기로 남자가 그런 일들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남자와 함께 비난 받아야 할 사람은 없는지 고민하며 지커보게 된다.
깨어난 남자는 호숫가 근처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가진 어린 시절의 기억은 물과 연결되어 있다. 그의 과거가 기억 안에 잠겨 있다는 것은 물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무대 장치 속 소품으로 표현된다. 무대 위에서는 물이 쏟아지고, 기억 속 사람은 무대 위 물길을 걸어간다. 어항 속에는 살해 도구가 버려져 있다. 모든 것이 물이다. 작은 무대에서는 보기 힘든 새로운 발상이다.
그런데 무대가 관객석 눈높이보다 낮아서 중간 구역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품들이 제 구실을 하는 광경을 거의 확인하지 못했다. 맨 앞자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부분이다.
뮤지컬 [인터뷰]와 관련이 있는 연극이라고 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뮤지컬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연극을 즐기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연극 초반 주어진 힌트만으로 충분히 답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마시길.
다만 연극 한 편에 인생의 의미와 삶의 깨달음을 얻어야 마음이 후련하신 분들은 이 연극을 그냥 지나치셔도 좋겠다. 80분 동안 잘 짜인 퍼즐을 맞추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