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

- 광림아트센터 BBCH홀

by 지안

1909년 영국 런던의 감옥에서 젊은 남자가 무언가를 쓰고 있다. 잠시 후 사형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솔직하게 그간의 이야기를 적겠다고 말한다.




그의 이름은 ‘몬티 나바로’. 스페인 배우였던 아버지의 끼를 물려받은 탓인지 출중한 외모와 언변을 갖췄지만 가난한 데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평생 어렵게, 거친 일을 하며 그를 키웠던 어머니가 사망한 후 혼자가 된 몬티 앞에 처음 보는 중년 여인이 찾아온다. 몬티는 어렵사리 그녀가 어머니와 편지를 나누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하지만 그녀는 몬티에 대한 의외의 사실들을 들려준다. 어머니조차 해준 적 없던 어머니의 과거 이야기와 함께.


그녀는 몬티의 어머니가 고귀한 ‘다이스퀴스’ 가문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머니는 잘못 선택한 결혼으로 인해 가문에서 제명되고 잊혀졌다. 당연히 몬티의 몸에는 절반 정도 다이스퀴스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어머니가 가문에서 제명되지만 않았다면 몬티도 백작이 되는 후계자 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순서는 좀 뒤쪽이어서 고귀한 ‘다이스퀴스’ 가문을 이을 수 있는 여덟 번째 후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몬티는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로 결심한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일곱 명의 후보들만 사라진다면 몬트는 저 고귀한 다이스퀴스 가문의 백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몬티는 젠틀맨이 되기로 결심한다. 부와 명예가 따라오는 젠틀맨이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도 있고, 평생 무시당한 어머니의 복수도 완성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젠틀맨스 가이드는 로이 호니먼의 소설 [이스라엘 랭크: 범죄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했다. 로이 호니먼 원작에서 주인공 ‘랭크’는 신분 높은 유대 가문의 어머니와 가난한 외판원의 아들로 등장한다. 유대인이던 주인공 ‘랭크’의 국적이 영국으로 바뀐 [친절한 마음과 화관]이라는 영화가 1949년 만들어진 적도 있다. 2012년 Robert L. Freedman에 의해 [젠틀멘스 가이드]라는 뮤지컬로 각색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국내에서는 2018년 초연 후 이번에 세 번째 무대다.




젠틀맨이나 백작이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 몬티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신분제가 확고한 세상이다. 하이허스트 성에 살고 있는 애덜버트 다이스퀴스백작은 돈을 벌기 위해 일반인들에게 ‘하이허스트 성 투어 상품’을 만들어 파는 속물인 주제에 관람객들을 멸시하고 조롱한다. 관람객들 앞에 나타나 돈 낸 만큼만 구경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왜 가난하고 그래”라며 호통을 친다.


도무지 사람들이 왜 가난한 지 이해가 안 된다고 노래를 부르는 백작은 딱 한 놈만은 이해가 된다고 중얼거린다. 술독에 빠져 방탕하게 살다 가문에서 제명당한 사촌 동생 만시의 이야기다. 그놈을 뺀 다른 놈들은 전부 왜 가난하고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일자리를 부탁하는 몬티에게 애스퀴스 2세 다이스퀴스가 보여주는 행동은 또 어떤가. 가난의 냄새가 난다며 근처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애스퀴스 2세가 집중하고 있는 일은 주색잡기다. 천박하다.


이제 몬티는 자신의 자리를 찾겠다는 열망과 함께 어머니가 도움을 청했을 때 거절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다짐으로 불타오른다. 제대로 흑화를 시작한다. 과연 그는 젠틀맨이 되는 지침대로 잘 수행할 수 있을까?




무대 가운데에는 커다란 노트가 놓여있고 몬티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문장이 채워진다. 즉 무대는 하나의 거대한 회고록이다.


무대 2층 발코니에서는 음악팀이 직접 연주를 들려준다. 몬티 역의 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몬티’인 것과는 달리 ‘다이스퀴스’역의 배우는 ‘다이스퀴스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배역’을 소화한다. 1인 9 역이다. 남자인 다이스퀴스도 있고, 여자인 다이스퀴스도 있다. 나이 든 다이스퀴스도 있고, 어린 다이스퀴스도 있다. 모두 한 명의 배우다. 다이스퀴스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웃음이 터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만큼 배우의 역량이 중요하다.


정문성 다이스퀴스는 그 역할을 엄청나게 해낸다. 아 이런 농약같은 남자. 애드리브가 쏟아지는 바람에 몬티 역의 고은성 배우까지 웃음이 터져 버렸고 150분 공연 시간 내내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훤칠한 외모와 빼어난 노래 실력으로 음...저러니 몬티에게 다들 넘어갈 수 밖에..라고 생각하게 만든 고은성 배우도 대단하다.


원작이 있는 뮤지컬의 미덕답게 플롯도 탄탄하다. 하이허스트 성 투어에서 만난 백작의 노래를 잘 들어 두지 않으면 극 마지막 나타난 어린 다이스퀴스의 정체에 대해 의아해질 것이다. 그러니 노래 한 소절, 대사 한마디까지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귓가에 남는 음악도 소중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다이스퀴스, 다이스퀴스’라는 후렴이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훅은 중요하다.




복수심에 불타던 몬티에게 처음으로 기회를 준 것은 에스퀴스 1세 다이스퀴스였다. 그는 몬티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른 답장을 보낸다. 그리고 몬티에게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의 아래에서 일 하면서 몬티는 처음으로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을 누린다. 가난도 어느 정도 해결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에스퀴스 1세는 점점 더 몬티를 신뢰하게 된다. 진심으로 몬티를 아껴준다. 많은 다이스퀴스를 제거하던 몬티도 에스퀴스 1세 앞에서는 마음이 흔들린다. 어머니의 도움을 묵살한 나쁜 사람이라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소용없다. 도무지 그에게는 살의가 생기지 않는다. 몬티는 주저한다.


스포를 덧붙이자면 다이스퀴스 가문의 7명의 후계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거된다. 사용된 방법이 신선하다. 하도 많은 다이스퀴스 들이 죽어나가자 신문에는 가문의 저주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지만, 마지막 남은 애덜버트 다이스퀴스 백작을 제외하고는 누구 하나 크게 마음 쓰는 사람들은 없다. 다이스퀴스 가문은 이미 명예 따위는 없어진 돈만 남은 가문이었던 것이다. 젠틀맨이란 것도 알고 보면 허울뿐인 이름 아니던가.


젠틀맨은 뭘까? 젠틀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실은 돈과 명예가 갖고 싶은 것이다. 일하지 않고 부를 누리면서 자신의 말 한마디로 큰 영향력을 누리고 싶은 본능, 젠틀맨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욕망은 그런 것이다. 그런 지저분한 욕망을 손에 넣는 방법이 깨끗하고 고귀한 것일 리는 없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그 과정을 재미있게,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다. 재미있지만 뒷맛이 씁쓸한 사탕 같은 뮤지컬이다. 혹은 제대로 격식을 갖춰 받은 아름다운, 그러나 맛은 더욱 훌륭한 한정식같은 뮤지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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