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스 인 아메리카-파트 원 : 밀레니엄이 다가온다

- 명동 예술극장

by 지안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 우린 모두 미쳐 버릴 거야.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 ‘밀레니엄’이라는 단어에 ‘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라는 느낌이 담겨있던 때가 있었다.


2000년 즉 ‘밀레니엄’이 되면 ‘19**’로 표기하는 Y2K 문제 때문에 모든 컴퓨터가 멈출 것이라는 예언부터 말 그대로 지구가 끝장 날 것이라는 종말론까지 환상적인 이야기가 범람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1990년대를 휩쓸다 2000년 1월 1일 세상의 컴퓨터가 모두 안녕하다는 판정이 날 때까지 이어졌다(안 믿겠지만 Y2K 문제는 상상 외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서 1999년 12월 31일부터 2000년 1월 1일까지 연장 근무한 회사원의 숫자도 상당했다. 나도 그중 하나다). 지금 생각하면 미국인들의 진정한 ‘밀레니엄’은 2000년 1월 1일이 아니라 2001년 9월 11일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어디까지나 ‘지나가고 난 후’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지금 COVID-19이 전 세계를 숨 막히게 하고 있지만 인간의 역사에서 전염병이 창궐했던 시기는 많았다. 페스트나 콜레라 같은 것들 말이다. 천연두가 아니었다면 코르테스나 피사로가 그렇게 거저먹기 식으로 남미대륙을 집어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유행병 중에서도 ‘AIDS’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치료 불가능한 질병이라는 불행 안에 ‘혐오와 배제’의 정서가 응축되어 있다. 동성애자나 마약중독자(주사기를 재활용하다 전염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알려졌다)가 걸리는 질병이라는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AIDS 환자들은 진단과 동시에 개인적인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그 사실을 숨기는데 급급해야 했다. 1980년대 보고되기 시작한 이래 AIDS 환자는 줄곧 혐오의 대상이었다. 수혈을 받거나 이성간 접촉을 통해서도 전염될 수 있다는 캠페인이 벌어질 정도였고, 백인 엘리트 AIDS 환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도 엄청나게 제작되었다. 하지만 일단 굳어진 편견을 뿌리 뽑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엔젤스 인 아메리가]는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무대 위에는 유대 십자가가 그려진 휘장이 덮인 관이 놓여있고, 아직 불이 환한 무대 위로 누군가 비척비척 걸어 나온다. 흰머리의, 등이 굽고 늙은 유대인 랍비다. 그는 죽은 여인을 추모하기 위해 그곳에 나타났다. 하지만 치매 때문에 요양원에 10년 넘도록 살았던 노인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리가 없다. 짧은 조사가 끝난 후 그 여인, 루이스의 할머니는 땅에 묻힌다.


‘왜 관 뚜껑에 못을 두 개밖에 박지 않았느냐’고 루이스가 묻는다. 루이스는 10년이 넘도록 할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다. 너무 오래 요양원에 방치했던 탓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할머니가 그간 살아있었음을 알고 놀랐을 정도다. 그런 루이스에게 랍비가 말한다. ‘저 여인처럼 불행하게 살았다면 못 두 개만 박았다고 관 뚜껑을 박차고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연극에는 이런 식의 차갑고 날카로운 유머가 가득하다. 진지하고 무겁지만 마냥 가라앉지는 않는다. 물론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이런 식의 유머도 가볍게 즐기기는 쉽지 않다. 덕분에 연극 내내 관객석 이쪽저쪽에서 간헐적으로 웃음이 세어 나왔다 사라지는 일이 반복됐다.




큰 무대 위에는 원형의 무대가 360도 돌아간다. 루이스와 프라이어의 침실이었다가, 하퍼와 조의 부엌이 되기도 한다. 로이의 사무실이었다가 센트럴파크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해도 모자란 부분은 무대 양쪽에서 작은 소품들이 나타나 채워진다. 뉴욕주의 아파트였다가 솔트레이크 시티의 풍광이 펼쳐진 단독 주택이 되기도 한다. 하퍼와 조가 입씨름을 벌이는 거실과 루이스와 프라이어가 대화를 나누는 침실이 겹쳐진다. 두 커플의 대화는 중의적이다. 멋지다. 장소의 제약이 사라진 연극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늘에서 무언가 내려오기도 한다. 눈을 뗄 틈이 없다.




루이스의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한 프라이어는 자신이 AIDS에 걸렸음을 고백한다. 이미 그의 몸에는 AIDS의 신호인 카포시육종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라이어 월터는 와스프 가문의 후계자다. 미국에 청교도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살고 있던 뼈대 깊은 가문의 후손이며 백인 중의 백인이다. 유태인이자 그의 애인인 루이스는 공포에 질려 프라이어를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고민을 토로하는 그에게 랍비는 묻는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짓을 하나?”


무대가 돌아가면 로이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 조의 모습이 보인다. 말 한마디로 미국 정계를 움직이는 로이는 애송이 변호사 조를 선택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숨기고 조를 움직이려 한다. 갖은 말로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현란하기 이를 데가 없다. 로이는 ‘로이 마커스 콘’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 조셉 매카시의 오른팔, 레이건 대통령의 고문, 도널드 트럼프의 멘토로 알려진 유태인 변호사다. 그는 자신이 법률 고문이었다면 닉슨이 사임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는 말을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악마의 변호사다.


AIDS에 걸렸다고 말하는 의사에게 로이는 말한다. ‘AIDS는 호모나 약쟁이들이 걸리는 거잖아? 남자랑 자는 남자가 호모는 아니야. 저기 밖에 차별금지법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는 힘없는 남자가 남자랑 잘 때 호모가 되는 거야. 난 힘이 있어. 난 남자랑 섹스하는 이성애자야. 그러니까 난 AIDS에 걸리지 않아. 난 간암이야.’ 로이라는 인물을 이보다 잘 설명해주는 대사는 없다. 악마랑 말싸움을 벌여도 이길 것 같은 변호사다.




솔트레이크 출신의 몰몬교도인 조는 자신을 출세시켜 주겠다는 로이의 제안을 받고 고민한다. 그에게는 바륨에 중독된 아내 하퍼가 있다. 로이는 모든 것을 버리고 조의 행복만을 따라가라고 충고한다. 물론 그것은 ‘로이의 행복’과 일치해야만 한다. 한걸음 로이 쪽으로 넘어오라는 제안을 받은 후에야 조는 자신이 이미 본래의 모습과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너무 오래 아닌 척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되돌리기에는 상처 받을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숨긴다고 감춰지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극의 대사처럼 ‘진실은 사람을 엿 먹이는’ 법이니까.


애인마저 떠나버린 프라이어에게 남은 사람은 벨리즈뿐이다. 흑인이고 동성애자인 벨리즈는 프라이어를 진심으로 위로한다. 그렇다고 루이스를 크게 비난하지도 않는다. ‘정의는 쉽지만 사랑은 어려워. 그래서 사랑할 때 규칙을 깨면 안 되는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만 말이다. 미국의 인종 문제에서 가장 차별받고, 거기에 성소수자이기도 한 벨리즈는 가장 포용력 넘치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프라이어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약의 부작용인가? 뭔가 보이기도 한다. 흑사병으로 죽은 프라이어 월터와 콜레라로 죽은 프라이어 월터가 나타난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1988년부터 집필을 시작했다는 토니 쿠쉬너(Tony Kushner)의 이 작품은 1991년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졌고 이후 알 파치노 주연의 TV시리즈로도 제작되었다. 이번에 상연된 [파트 원 : 밀레니엄이 다가온다]는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이번 극은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전반부다. [파트 2 : 페레스트로이카]는 2022년 2월 올려질 예정이다. 파트 1이라고 해서 짧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7시에 시작한 연극은 두 번의 인터미션 후 11시 8분에 종료되었다. 4시간이 넘는 작품이다. 하지만 단 1초도 지루할 틈은 없다.


토니 쿠쉬너는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에도 정치색과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레이건과 공화당에 대한 비판이 극 전체에 철철 넘친다. 그러니까 사전 준비 없이 극장을 찾으면 조금 난감할 수도 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인종 문제나 사회 문제에 대한 담론들이 힘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유대교와 몰몬교, 기독교를 나누는 정서도 조금은 머리에 넣고 가는 편이 즐기기에 좋다. 다른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바탕에 깔려 있으니 마냥 쉽기만 한 연극은 아니라는 말이다.




박지일 배우는 악의 화신 ‘로이’를 얄밉도록 제대로 보여주었다.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한방 먹일 뻔했다. [스웨트]에서 만났던 김세환 배우와 박용우 배우도 반가웠다. 김세환 배우가 연기한 나약하고 뻔뻔한 루이스도 안타까웠고, 박용우 배우가 연기한 사랑스러운 벨리즈의 모습도 마음에 박혔다. 국립극단의 무대에는 마이크가 없다. 배우들이 제대로 발성하지 않으면 대사가 안 들린다. 티브이나 영화를 주로 하는 배우들이 연극무대에 섰을 때 관객을 실망시키는 가장 큰 부분이 대사 전달력이다. 하지만 정경호 배우는 제대로다. 깜짝 놀랐다. 그 외 배우들의 열연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연극은 무대 장치만으로 박수를 받을 만하다. 관람료가 미안할 지경이다. 게다가 엄청난 연기라니 할 말이 없다. 파트 투의 입장료를 인상하겠다고 해도 격하게 이해하겠다. 정말이지 ‘본전’ 같은 말은 꺼낼 수도 없다.


이제 겨우 ‘파트 원’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성격 정도만 파악했을 뿐이다. 파트 투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되지만, 아마 참지 못하고 티브이 시리즈를 보러 갈 것 같다. 너무 궁금하다. 스토리를 알고 가도 파트 2를 관람하는 것에는 문제없을 것이다. 이 배우 그대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년 2월이 몹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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