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맨 :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 국립 정동극장

by 지안

달리는 열차 속에서 눈을 떴다면, 우리는 기차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 ‘속도는 얼마인지’, ‘목적지는 어디인지’ 같은 기본적인 것들도 말이다. 살기 위해서는 먹고 마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신경 쓸 틈이 없다. 이따금 누군가 나를 칭찬해주기도 하고, 가끔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면 더더욱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그저 바쁘게 지나가는 일상에 최선을 다할 뿐.


아주 가끔,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밤에 홀로 깼을 때, 기차가 어떤 이유로 심하게 덜컹거릴 때, 탈선할 것처럼 달려가는 기차 속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때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왜 이렇지?’, ‘무슨 일이 생기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에 움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침이 되고, 어느새 기차는 제 속도를 찾고, 하루는 반복된다.


결국 ‘그 열차’에서 내린 후, 굳은 땅 위에 발을 딛고 저 멀리 달려가는 열차를 바라볼 때나 되어야 제대로 체감할 수 있다. 기차가 얼마나 미친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지, 그래서 결국 나를 어느 곳에 던져버렸는지 깨닫게 된다.




쇼맨은 그런 이야기에 관한 뮤지컬이다. 주인공 네불라가 탔던 기차는 그를 던져 버린 후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는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기차에 타고 있는 수아’에게 묻는다. ‘내 인생을 판단해 달라’고 수아에게 요청한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날 어떻게 봐야 하는지. 내가 너무 싫은데, 싫어하고 싶지 않아요”라며 네불라는 흐느낀다. 수아는 과연 그 요청을 들어줄 수 있을까? 수아의 고뇌와 상관없이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생각해야 한다. 내가 탄 차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과연 나는 '내가 기차에 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막이 오르기 전부터 무대 위는 악기를 조율하는 작은 소리들로 부산하다. 큰 무대가 아닌 탓에 연주자들의 좌석만으로도 이미 무대는 꽉 차 보인다. 덕분에 수아가 일하는 ‘굿데이 마트’도, 네불라의 직장인 ‘유원지’에도 새로운 세트는 없다. 소품과 조명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하지만 충분하다. 무대는 뉴저지의 마트였다가 곧 이제는 없어진 나라 ‘파라디수스’의 광장이 되었다가, 뉴저지의 밤 공연장이 된다.


뉴저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입양아 ‘수아’는 성실하게 마트에서 일하는 직원이다. “모든 버려지는 것엔 이유가 있다”라고 믿으며, “빈틈없이, 누구도 내 일을 넘볼 수 없게”한다면 자신은 괜찮을 거라고 주문을 건다. 마침 ‘매니저’로 승진할 기회도 눈앞에 있다. 경쟁자가 있으니, 당연히 작전이 필요하다.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할 참이다. 그것이 부도덕한 일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온다. ‘그래 봐야 마트 매니저야, 왕이 아니라.’ 이런 빌어먹을. 하지만 수아에게는 이렇게라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버려질까봐. 사실 입양아란 (아이들 탓은 아니지만), ‘이미 한번 부모에게 버려진’ 사람 아닌가. 수아는 그 상처를 안고 끙끙거린다.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그녀는 근처 유원지를 찾는다. 그곳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통이 가라앉길 기다린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그녀가 네불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유원지에서 인형 탈을 쓰고 돌아다니는, 호구 같아 보였던 네불라가 파라디수스(극 중 만들어 낸 가상의 나라다.)의 잔인한 독재자 미토스의 ‘네 번째 대역 배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뮤지컬은 초연이다. 이전에도 늘 함께 작업했던 능력있는 극작가-연출가 -작곡가 트리오가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라고 하지만, 뮤지컬 마니아가 아닌 관객이라면 그것만으로 돈을 내기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는 무리다. 관객평도 없고, 시놉시스는 어둡다. 뮤지컬이란 화려한 장르다. 시종일관 춤과 노래가 흘러나와야 한다.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그런 장르로 풀어낼 수 있을까? 괜히 처음만 요란하다 결국 오리무중이 되는 것은 아닐까? 비싼 돈을 내야 하는 관객들의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뮤지컬, 탄탄하다. 가벼운 주제가 아닌지라 마음 놓고 즐길 수는 없지만, 이야기 구조가 단단해서 다음 장면, 그다음 장면이 계속 기다려진다. 극 초반 “너 만의 뭔가”를 찾아야 한다며 “오리지널”을 외치는 노래는 머릿속으로 이미 쑥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6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춤은 무거운 이야기 사이 웃음을 준다. 한바탕 휘몰아친 후에 ‘아, 전부 6명이 이 모든 것을 했구나’라는 감탄을 하게 한다. 나는? 뭐, 윤나무 배우를 보려고 극장에 갔다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만족보다 몇십 배는 커다란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네불라의 노래와 함께 무대는 시작된다. “인생은 내 키만큼 깊은 바다. 파도는 계속 쉼 없이 밀려오는데, 나는 헤엄칠 줄을 몰라.” 흰머리가 성성한, 구부정한 노인의 슬픈 노래다. 음, 인생은 뭐 그렇지. 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리고 마지막 역시 이 노래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미 네불라와 수아의 인생을 들여다 본 후다. "인생은 딱 내 키만큼 깊은 바다, 나는 헤어칠 줄을 몰라." 이 노래는 더 이상 처음과 똑같이 들리지 않는다. 마치 내가 물 속에 잠긴 것처럼, 딱 내 키만큼 깊은 물속에 서 있는 것처럼 도무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내 인생 역시 깊은 바다다. 살기 위해, 호흡하기 위해 수면으로 솟구치지만 매번 가라앉는 일의 연속이다. 당신의 인생은 어떠한가? 혹시 오늘 밤 조용히 홀로 깨어 나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같은 물음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꼭 추천하고픈 뮤지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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