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홍익대학교 아트센터 소극장

by 지안

화창한 주말, 한 겹 걸친 티셔츠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오후에 대학로에 갔다. 흰 반팔에 조끼, 짧은 주름치마 아래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은 사람을 모퉁이를 돌 때마다 발견했다.


“저 옷, 요즘 유행이야.”


‘이 더위에 부츠 속에서 꼼지락거려야 하는 발은 무슨 죄야?’라며 못마땅해하는 나를 위해 일행이 대꾸해줬다. 유행? 좋다. 그럴 수 있다. 문제는 ‘반팔 입을 날씨에 부츠 속에 갇힌 타인의 발’에 곧바로 감정 이입된 나니까. 타인의 발은 걱정하지 말고 내 갈 길을 가는 편이 좋다. 저 복장이 ‘유행’이라면, 앞으로도 한동안, 꽤 많은 빈도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유행이란 그런 것이니까. 체념하고 극장으로 들어섰다.




무대는 없다. 혹은 모든 곳이 무대다. 66개의 의자가 빙 둘러져 있는 가운데 6개의 의자가 동그랗게 놓여있다. 벽은 온통 두터운 검은 색으로 둘러져 있어 조명을 제외하면 한 톨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검은 옷과 짙은 스모키 화장, 펑크 머리를 한 네 명의 사람이 들어온다. 자신들이 연극에 출연할 배우들이며, 극 중 사용될 효과음, 무대, 규칙에 대해 말한다. 소설가가 도입부에 사전 설명을 해주는 것처럼 친절하다. 다만 독자는, 그러니까 관객은 이제 상상해야 한다. 검고 좁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관객의 상상과 퍼즐을 맞추듯 움직여야 한다.




그들은 ‘유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유행’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아무리 이상해 보이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도 ‘유행’ 이라는 이름으로 힘을 얻으면 모두가 따라한다. 나는 속으로 배우들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한 남자가 힘겹게 무거운 기계를 들고(혹은 든 척하고!) 무대 중앙으로 나온다. 아마도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그는 절망했고, 외로웠으며, 아내의 죽음에 대해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할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만든 기계는 사후 세계의 아내와 대화할 수 있는 ‘통신기’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기계를 소개하기 위해 ‘무료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사람들은 ‘사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는 남자의 설명에 코웃음을 친다. 남자의 아내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그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선택하고, 마침내 기계를 통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분위기는 급격하게 변한다.


“어떻습니까? 죽어보니까 느낌이?”

“생각보다 훨씬 좋아요. 이렇게까지 상쾌할 줄을 몰랐습니다.”


사는 일은 힘들다.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다. 남들은 다 잘 살고 있는데 나만 힘든 것도 같다. 그런데 죽음은 그렇지 않다고? 정말 그렇단 말이야?


남자의 말에 거의 설득된 사람들은 기계를 통해 죽은 지인들을 불러낸다. 그들에게 남자의 말이 맞는지 확인한다. 세상에…… 남자의 말이 맞단다. 죽은 친구가, 돌아가신 엄마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 수 있다. 사람들은 기꺼이 삶을 집어 던진다. 모든 사람이 망자들과 대화한 후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알아서 죽어버리는 사람도 많다. 죽음은 하나의 유행이 된다. 기계가 지나간 자리에는 거대한 시체의 산이 쌓인다.





생각해보면,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 어렸을 때, 학년이 바뀔 때마다 어떤 친구를 만날지, 선생님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흥분과 함께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처음 보는 일에 뛰어 들 때도 우리는 두려워한다. 대부분의 일이 막상 해보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새로운 일을 마주할 때면 가슴 한 켠에 몽글하게 두려움이 깔린다.


죽음이란 이런 ‘모르는 일’의 완벽한 형태다. 과학적 견지에서 ‘부활한 사람’은 없다. 한 번 '죽어 봤던' 사람은 없다. 죽음을 경험했다는 임상 체험자나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영매’가 이야기를 할 때면 과학은 그들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뇌파나 호르몬, 그외 기타 등등으로 과학은 혹했던 우리의 마음을 차갑게 만든다. 죽음이란 여전히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이고 모르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두렵다.


그 두려움을 이용했던 것이 종교다. 착하게 살면 천당에 가고, 나쁘게 살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위협했다. 자살은 가장 큰 악덕이다. 살아라, 그리고 네가 가진 것 중 괜찮은 것을 종교에 내놓아라. 사람들은 고된 현재를 천당을 상상하며 버텼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난 과학은 종교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신은 없다고, 인간이란 유전자의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한다. 어허, 이것 참. 과학은 인간의 수명을 두 배로 늘리는 대신 희망의 천당을 빼앗아가 버렸다. 우리의 두려움은 두배가 되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상쾌한 것’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계 앞에 쌓인 시체더미처럼 죽음을 선택할까? 죽은 내 친구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믿어야'할까? 그 말만 믿고 두려움없이 죽음으로 뛰어들어야 할까? 세 명 중에 두 명이 그렇다고 우기면, 곡선도 직선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러니 고민하지 말고 남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맞을까? 유행이라면 모름지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이 연극 ‘순교’는 그것을 묻고 있다.


무대 형식이 독특해서 몰입하는데 도움을 받거나, 혹은 아예 몰입하지 못할 수 있는 작품이다. 배우는 바로 관객의 옆 자리에 앉아 극을 시작한다. 눈을 맞춘다. 당신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듯 한 명 한 명과 찬찬이 눈을 맞춘다. 새로운 경험이다.


하지만 기계가 온 나라를 휩쓸고 난 뒤 남은 사람들의 대화는 관객의 등 뒤에서 진행된다. 관객은 배우를 볼 수 없다. 관객은 생각해야 한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꽤 긴 대화 중 배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무대에 있는 것은 관객이다. 관객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자신의 믿음에 관해 판단해야 한다. 이 일이 버겁다면 당신은 극의 후반부에 전혀 몰입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에 관해 고민하는 관객을 돕기 위해 사용된 것은 조명과 약간의 스모그다.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이 아는 누군가가 사후세계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을 믿을 것인 것? 이미 ‘딥페이크’기술 같은 것으로 우리는 하지 않은 일까지 ‘한 일’이 되게 만들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당신도 조금만 유명해진다면 그런 치명적인 기술들에 악용되겠지. 이런 때에도 ‘죽은 자들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가?


연극의 마지막, 효과음만 간간이 나오던 극장안은 Radiohead의 ‘No Surperises’로 가득찬다. ‘그 어떤 불안이나 놀라움도 없기를…..’ 현재의 내게 딱 맞는 소망이다.




1시간의 짧은 연극이 끝난 후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반팔 티와 조끼, 주름치마와 부츠를 신은 여자는 절반쯤 신발을 벗은 채였다. 양쪽 무릎 아래는 걷느라 쓸린 상처로 발갛게 부풀어 있었다. 저 유행은 한 여름까지 가진 않겠어, 나는 지인과 소근거린 후 그들을 정류장에 남겨두고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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