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난 후 귓가를 맴도는 대사는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공연 내내 세인트 조앤, 즉 잔다르크와 주교와 성직자와 귀족들은 천 번 넘게 하느님을 외쳤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찾고, 하나님을 걸고 맹세하고 여하튼 하느님, 하느님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쓴 조지 버나드 쇼가 무신론자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 ‘하느님’이란 대사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그 신을 뜻하는 단어가 아닐 수 있다. 혹은 그렇게 부르짖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위해 즐겁게 사용된 비유이거나.
연극의 배경은 1337년에 시작해서 1453년에 끝난 ‘백년전쟁’이다. 2019년 개봉한 넷플릭스 영화 [더 킹: 헨리 5세]의 시대적 배경과 일치한다. 티모시 살라메가 연기한 헨리 5세에 맞서는 오만하고 성질 급한 데다 입만 살아있는 왕세자 도팽(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했다)이 훗날의 샤를 7세다. [더 킹: 핸리 5세]가 유명한 ‘아쟁크루 전투’를 소재로 만들어진(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이용한) 영화라면, 이 연극 세인트 조앤은 그 이후를 그리고 있다.
‘아쟁크루 전투’는 서양 전쟁사에서 빠지지 않고 다뤄지는 유명한 전투다. 절반에 불과한 병력을 가지고 영국이 프랑스에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전쟁은 영국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 지고, 패하고를 반복하던 프랑스군 앞에 ‘잔다르크’라는 소녀가 나타난다. 프랑스 로렌 지방의 시골 동레미에서 온 농부의 딸인 잔다르크는 ‘오를레앙을 포위한 잉글랜드 군을 물리치고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몰리고 있는 전쟁이었고,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던 샤를 7세는 잔다르크가 프랑스군을 지휘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런데 웬걸…… 잔다르크는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한다. 결국 하느님이 자신에게 명하신 대로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까지 거행한다. 완벽한 승리다. 그래서 잔다르크는 행복해졌을까?
연극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잔다르크가 ‘하느님’의 명령으로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하고 마침내 왕의 대관식을 치르는 것까지 진행된다. 연패를 거듭하던, 잔다르크가 살아 있는 한 프랑스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영국군은 잔다르크에게 어마어마한 몸값을 건다. 마녀라는 누명을 씌워 그녀를 화형 시킬 계획을 꾸민다. 인터 미션이 끝나면 사로잡힌 잔다르크의 재판과 이후의 상황이 펼쳐진다. 1920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성인 ‘세인트 조앤’으로 불리게 된 시기까지의 이야기다.
백년전쟁을 간단히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라고 말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영국’과 ‘프랑스’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공국과 백국들, 즉 봉건적인 공작과 백작이 다스리던 나라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다. 아직 절대왕정이 성립하기 전의 상황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전쟁은 봉건적인 성격의 국가들이 전제국가로 통합되는 시기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왕권이 강력해지면서 ‘교황’의 권위는 점점 줄어든다. 권력이란 힘의 집중을 원하는 법이니까.
연극은 ‘잔다르크’의 행적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관객은 다른 인물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랭스의 대주교는 “대주교는 일종의 우상”이라고 말한다.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다. 영화[더 킹: 헨리 5세]에서와 마찬가지로 찌질하고 한심하게 묘사되는 샤를 7세는 “난 왕이 되고 싶지 않았어. 난 그냥 나 자신이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태어나고 보니 왕이 되면 이런 말도 가능할 것이다.
영국의 워릭 백작은 “부르고뉴인, 브레통인, 피크드인, 가스콘인들이 자신들을 프랑스인이라고 부리기 시작했단 말인가?...... 제 나라를 위한다는 이런 엉뚱한 풍조가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면 봉건 군주가 갖는 권위는 끝장이고 교회의 권위도 끝장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연극의 인물들 중 가장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워릭 백작이다. 그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봉건 영주인 자신의 권력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에게 직접 말을 듣는 것’은 이단이 아니냐며 코숑 주교를 설득한다. “그 여자는 마치 자신이 교회인 것처럼 행동한다”며 불만을 품고 있는 코숑 주교의 손으로 잔다르크를 처단하고 싶어 한다. 코숑 주교 당신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주면 일은 아주 간단하게 풀린단 말이지….. 하지만 사람을 불태우겠다는 생각과 눈앞에서 불타는 사람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이 연극은 그런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중세시대의 이야기라 화려할 것 같지만, 이 연극의 무대는 극히 단순하고 간소하다. 복잡한 일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일이 돌아가는 형국을 제대로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무겁고 진중한 이야기만 펼쳐질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모름지기 ‘하인’이 등장하는 연극에는 소소한 웃음 포인트가 있다. 잔다르크의 화형에 관련된 인물들이 모인 마지막 장면은 따뜻하다. 모르긴 해도 조지 버나드 쇼라는 작가는 ‘츤데레’ 성격이었던 것 같다. 국가와 권력, 교회와 신의 이야기를 꽤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결국 마무리는 화목하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끝나 주는 것이 마음이 편하긴 하다.
하지만 극의 상황을 비판하는 말들은 현재의 시간에도 유효하다. 교회의 권력인 주교와 구 시대 정치권력의 상징인 백작은 짐짓 예의와 격식을 갖춘 채 음모를 꾸민다. 속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바보들만 화를 내거나 분노할 뿐이다. 코숑 주교처럼 “순진한 이에게 복 있을 지어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하느님’의 명령으로 규정하고, 하느님의 말에 따라 살고 있는 잔다르크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결국 자유인 것이다.
서사 구조가 있는 연극이라 집중하는데 어렵지 않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깊은 생각은 연극이 끝난 한참 후까지 머리에 머문다. 가볍게 스쳐간 대사 하나까지도 나중에 떠올라 곱씹게 되는 묘한 작품이다.
3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탄탄하게 흐름을 잡은 것은 배우들의 역량인 것 같다. 저절로 박수가 나온다. 주인공이자 유일한 여성 출연자인 조앤 역의 백은혜 배우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여러 배역을 소화하며 멋지게 극을 이끌어간 다른 출연자들도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샤를 7세를 연기한 이승주 배우는 극이 끝난 후 오히려 존재감이 되살아난다. 어쩌면 이 극을 통틀어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에게 도움 되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어리고 순진한 자들이 교회와 법 사이에서 박살이 나곤 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권력의 속성과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 우리 대부분이 그 ‘어리고 순진한 자들’이 아닐까. 끝난 후에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