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가 축 늘어진 영화감독이 있다.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설픈 영화제이긴 하지만 감독상을 받은 적도 있다. 나름 자부심과 자존심이 있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5년째 일이 없어 그때 받은 알량한 트로피마저 팔아야 할 처지다. 물론 그마저도 순탄하지않다.
그런 만춘에게 누군가 제의한다. 일본 시모노세키에 사는 조선인 사업가 와타나베 신이치의 자전적스토리를 영화로 찍어달란다. 내가? 단편영화로 한라봉 영화제에서 상도 탔던 내가 그런 걸 왜? 1억을 주겠대. 미리 말을 하지. 영화인의 자존심은 무슨....
만춘은 곧장 일본으로 날아간다.
그런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와타나베라는 남자도, 그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이상하고 무섭다. 맙소사, 이 와타나베 신이치라는 남자는 사업가가 아니고 야쿠자다.도망가야 한다. 그런데 돈을 벌써 써버렸는데 어쩌지? 손이 떨리고 말도 더듬거리게 된다.
심지어 와타나베라는 이 전직 야쿠자는 자신이 영화의 주연 배우가 되는 것으로 모자라 시나리오까지 직접 쓰겠다고 나선다. 만춘은 무사히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까.
푸른 휘장이 걸려있는, 목조로 지어진 무대는 단순하고 단조롭다. 무대 양 옆으로 계단이 놓여 있고, 안쪽으로 계단과 이어진 높고 기다란 단이 지나간다. 무대 장치라면 그 정도가 전부다. 배우들은 무대에 걸터앉거나, 긴 계단 위를 사브작 지나가거나 혹은 그 계단에 걸터앉는다. 수묵화의 한 장면처럼 여백이 드러난다.
장면이 바뀌어도 세트는 그대로다. 마치 텅 빈 액자 같다. 관객이 스스로 그 안을 채워야 한다. 시선을 빼앗는 것이 없으니 대사에 주목하게 된다. 마이크는 없지만 배우들은 낮은 목소리까지 빠짐없이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장항준'영화감독의 작품이라는 광고를 보고 호기심에 표를 샀다. 극 초반 만춘이 5년 동안 쓰다 엎다 하고 있는 작품의 제목이 "홀연했던 사나이"라는 대사를 듣고 나서야 오세혁 작가의 손길을 거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홀연했던 사나이라니..... 그렇다면 이 연극도 비슷한 궤도로 달려갈 것이다. 만춘은 이미 극 초반에 관객에게 이런 선전포고를 날린 셈이다.
예상대로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 대고 허풍이 끼어있다. 와타나베 역의 유병훈 배우는 60년대 한국 영화의 주인공처럼 목소리를 깔고 읊조린다.
이것은 협객의 길이다.
네. 그렇군요. 당시 화면에서 튀어나온 듯 어울린다. 와타나베의 수하이자 집사, 1인 몇 역의 신창주 배우와 정다함 배우 역시 동작이 크고 희극적이다. 물론 배우들 본인은 격하게 진지하지만.
자칫 붕 뜨고 정신없을 이야기를 인간계와 오롯이 연결시켜주는, 헬륨 풍선에 달린 줄 같은 존재가 만춘 역의 기세중 배우다. 훌륭하다. 이런 장르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배우들의 진지함이다. 배우들이 웃음이 터지면 망하는 것이다. 당연히 4명의 배우는 시종일관 진지하게 대사를 하고 탭댄스를 추고 머리를 쥐어뜯고 칼싸움을 한다. 유쾌하다.
언젠가 소설가가 강의하는 소설 작법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설에는 '재미'와 '주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제는 다 쓴 다음에 만들어서 넣을 수도 있지만 재미는 그렇지 않아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야 해요.
강사의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그는 주제 잡기가 가볍거나 쉽다는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일년동안 한 잠도 못자고 소설을 쓰는 것보다 어렵다.
그런데 이 연극은 재미있다.주제도 있다. 연극은 인생의 어느 한순간에 한, 나머지 삶에서 두고두고 후회하는 어떤 선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면 또 어떤가. 재미가 있는데 말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관객층은 좀 나이가 있었다. 2010년에 무대에 올려졌다는 초, 재연을 떠올리고 온 관객들인지 모르겠다(저는 그때 이 작품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적어도 이 관객들에게는 충분한 재미를 주는 것 같았다. 극 내내 웃음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중간에 퇴장하는 젊은 관객도 몇 있었다. 모두에게 먹히는 코드는 아니었던가 보다. 하긴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장르가 코미디다. 모두를 웃기기란 극도로 힘든 일이다.
연극 한 편에서 무릎 치는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이 연극은 권하지 않겠다. 90분 동안 쉴 새 없이 웃음의 복판에 빠지고 싶은 분들도 피해 가시라. 다만 배우들의 밀당과 담백한 대사, 그 사이 피식 솟는 웃음과 옅은 감동을 원하는 분께는 권하고 싶다. 이 연극, 엄청나게 세일 중인 건 안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