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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Nov 22. 2022

온 더 비트

- 대학로 TOM2관

불이 꺼진다. 지속되는 암전. 몸을 두드려 내는 원시적인 리듬이 들린다. 서서히 밝아지면 무대 중앙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17살의 아드리앙이다.


그는 드럼을 좋아한다. 드럼이라는  악기의  좋은 점은 굳이 드럼이 없더라도 소리를 낼 수 있는 점이란다. 지금 자신이 온몸을 두드려 리듬을 만드는 것처럼.


그런데 이야기를 시작하는 아드리안의 말투가 살짝 귀에 걸린다. 타인과의 관계보다는 자신에게 더 집중한 사람들 즉 자폐 성향이 묻어나는 말투다.


이윽고 리듬에 자신의 이야기를 싣는다. 그의 이야기는 록 비트를 타고, 재즈 비트 속으로 어떨 때는 살사 비트에 맞춰 흘러나온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드럼이 그냥 나를 찾아온 거죠."

아드리앙은 자신과 드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는 이런 사이를 '운명'이라 부르거나,  '사랑에 빠진'것이라 말한다. 어쨌든 둘은 이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둘만이 서로를 알아보고 인정할 수 있는 사이. 그들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스스로 놓아버리기 전까지는.


드럼을 갖기 전에도 물론 아드리앙은 리듬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몸을 두르려 소리를 내는 다음 단계는 뭘까? 그렇지.  엄마가 사용한 다 쓴 세제통을 뒤집어 놓고 두드리자 '다른 리듬'이 생긴다. 멋진 일이다. 드럼을 치자, 맙소사. 믿을 수 없이 멋진 소리가 흘러나온다. 사랑에 빠질 수 밖에.


물론 다른 사람들도 아드리앙의 리듬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의 리듬을 이해하거나 듣기 좋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뭐. 리듬은 아드리앙의 우주인걸.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며 남긴 LP들과 축음기를 들으며 음악을 익힌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건만 뭉쳐 있는 음악을 갈라 내 각각의 악기가 내는 소리들을 구별하여 늘어놓을 줄 안다. 그렇지. 비트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소리 사이 침묵이 없다면, 그것은 음악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인생에서 황홀한 사건만 연이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인생은 아닌 것이다.




Cedric Chapuis가 쓴 이 작품은 2003년에 프랑스에서 초연되었고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무대에 처음 올려졌다.


배우는 주인공 아드리앙의 모습으로,  엄마의 얼굴로, 가끔 베르나르 아저씨의 주먹으로 빙의한다. 교장 선생님의 모습이 되었다가 세실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즉 이 작품은 1인극이다. 그의 곁에는 아드리앙이 13살이 되었을 때 만난 친구이자 세상을 향한 소통의 통로인 바다의 색처럼 푸른 빛깔을 가진 드럼이 있다. 배우와 드럼, 그것이 전부다. 그렇다고 무대가 비어있다는 느낌은 없다. 조명이 충분히 제 몫을 하고  배우의 격정과 느낌, 아픔이 표현 되도록 돕는다.


어떤 줄거리 인지도 모르고 공연 첫날 극장을 찾은 이유는 윤나무 배우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라도 그가 하면 다르겠지. 불이 켜지고 그가 첫 대사를 시작할 때 내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무대가 좁다는 듯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고 연주한다. 역시 최고다.



하지만 이 연극이 훌륭했느냐 묻는다면 말을 좀 더듬어야 할 것 같다. 사건들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평범한 것이고, 극 후반 떡밥처럼 던져진 에피소드는 튀는 이야기로 남는다. 배우의 연기가 이토록 훌륭함에도 중반 이후 이야기가 늘어진다고 느껴지는 까닭이다.


아드리앙을 둘러싼 인물들의 모습도 너무나 흔하고 평면적이다. 심지어 아드리앙 자신조차 개성없이 묘사된다. 자신의 주변에 대해 딱 부러진 견해를 보여주던 초반의 아드리앙과 격정에 정신을 잃은 주인공은 얼핏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작가가 왜 이 작품을 쓰게 됐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리듬으로 살아간다. 누구도 그것을 빼앗거나 억지로 심어줄 수 없다.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마침내 그것을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기다리는 것은 암울한 결과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서 그런 일은 늘 벌어진다. 인생은 언제나 헤피엔딩은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윤나무 배우의 연기는 흠잡을 곳이 없다. 말 한마디 대사 하나가 불행한 아드리안의 살아있는 속삭임처럼 들린다. 하지만 드럼 천재 아드리안이라고 하기엔 아직 그의 드럼 실력은...... 아마 공연이 끝날 때쯤 되어야  완벽한 연주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아드리앙의 말처럼 드럼이란 연습과 연습 또 연습이 중요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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