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38년 중국 호남성 장사

- 뮤지컬 [제시의 일기]

by 지안

2.1 뮤지컬 [제시의 일기]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난다. 개전 초 일본군의 공세는 엄청났다. 중국은 화북지방을 순식간에 내주고 상하이를 지키는데 실패하더니 결국 수도 난징까지 적의 손에 넘겨준다. 난징에 진입한 일본군은 중국군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난징 시민들을 학살한다. 이른바 ‘난징 대학살’이다.




항저우로 이미 자리를 옮기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도 피난길에 올랐다. 항저우에서 진강, 장사로, 그리고 광저우와 유주를 거쳐 기강까지 이동한 임시정부는 마침내 1940년 충칭에 새 보금자리를 만든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관련된 사람들은 전쟁과 일본군을 피해 끝도 보이지 않고 목적지도 알 수 없는 이동을 무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계속한 것이다. 버텨낸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생존조차 기적 같아 보이는 그 시간 속에서도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또 어떤 생명은 태어났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낸 양우조와 대한 애국 부인회 총무였던 최선화가 그랬다.


1937년 진강 임시청사에서 두 사람은 김구 선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다.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 인사들과 함께 장사에서 도착했을 때 딸이 태어난다. 양우조는 일기의 첫 장에 이렇게 쓴다.


“1938년 7월 4일, 중국 호남성 장사, 제시가 내게 온 것은 음력으로 6월 7일 아침이었다.”


부부는 폭탄이 떨어지고 학살이 벌어지는 피난길을 이동하면서도 딸에게 줄 육아 일기를 쓴다. 일기는 제시의 동생 제니가 태어난 후에도 이어지다 해방을 맞이하고 고국 땅에 정착한 후에 비로소 끝난다.




어둠을 뚫고 행복을 쟁취한 판타지 소설 같은 느낌이 들지만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실화다. 뮤지컬은 김현주 작가가 쓴 <제시의 일기>라는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김현주 작가는 양우조, 최선화 부부의 손녀이며 제시의 딸이다.


제시가족사진.jpg 국가보훈부에서도 인정한 제시의 가족사진


작가는 “대가족 식솔처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임시 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삶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책을 썼다고 적었다. 작가의 말처럼 <제시의 일기>는 단순한 육아 일기이기도 하지만 고난의 시기를 헤쳐 나온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속사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도 평가받는다.




극장에 들어서면 벽을 감싸는 스크린과 커다란 의자가 놓인 단순한 무대가 보인다. 천으로 제작된 스크린은 중간이 뚫려 있어 무대 밖과 안을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스크린 위로 비치는 그림들이 바뀐다. 화려한 도시의 밤거리였다가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가 되기도 하고 폭격으로 다 부서진 시골 거리로 변한다.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방식이다.


불이 켜지면 빗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무대로 걸어 나온다. 이런 ‘흉하게 흐린 날’을 엄마가 좋아했다고 말하며 서랍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낸다. 어른이 된 제시다.


딸의 이름인 ‘제시’는 집안의 돌림자인 ‘濟’에 시작하다는 의미의 ‘始’를 붙였다. 영어로 쓰면 Jessie. 영어 한 마디 모른 채 19살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노동을 하며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한 아버지 양우조는 제시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써 놓았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기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제 몫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아기 또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 있는 한국인으로 활약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었다.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한다. 우리 제시!”


아이를 낳고 보름이 되지 않아 가족은 또 피난길에 오른다. 학살의 참상을 목격하기도 하고 폭격을 피해 기차 밖으로 뛰어내리기도 한다. “먹을 것, 입을 것, 머무를 곳을 제쳐 두고 늘 짐을 쌀 준비를 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라고 아빠는 일기에 적는다.


엄마가 ‘흉하게 흐린 날’을 좋아했던 이유도 그런 날에만 전투기가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격의 공포에 떨 필요도, 방공호로 숨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것을 정상적인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나 하는 갑갑하고 딱한 심정이 된다. 부부는 태어나자마자 피난길에 동행한 딸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일기에 적는다.


“아이가 훗날 이국을 떠돌면서 생활했던 이유를 묻는다면, ‘너의 미래를 위해서였다.’는 짧은 한마디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이야기의 배경이 무겁고 스산해서 뮤지컬의 분위기마저 그럴 것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이 뮤지컬은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흘리면서도 굳건하게 중심을 잡는다. 딸에게 사랑을 쏟는 부부의 이야기, 그것을 회상하는 딸의 마음에 집중한다. 부모가 쓴 일기를 읽는 형식으로 시작한 뮤지컬은 그 일기 속 사건을 따라 흘러간다. 이미 부모보다 나이 먹은 미래의 제시는 그 사건들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어린 제시로, 때로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 역할을 한다. 영리한 방식이다.


제시.JPG 뮤지컬 [제시의 일기] 프레스콜 유튜브 영상 갈무리


극장을 나오면서는 “제시 캔 두 잇”을 웅얼거리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중독성 있는 멜로디라 떼내기가 쉽지 않았다. 작은 무대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 준 뮤지컬이라고 말하고 싶다.




1945년 8월 원자 폭탄 투하라는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미국 OSS와 함께 서울 진격 작전, 일명 ‘독수리 작전’을 만들어 훈련하고 있던 임시 정부와 광복군 입장에서는 미묘한 마음이 교차했을 것이다. 특히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일하고 있던 양우조의 입장에서는 기쁨과 황망함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독수리 작전이 조금만 일찍 시도되어 우리 힘으로 우리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즐겁게 뮤지컬을 관람하고 돌아가는 머리 한쪽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랬다면 “이완용에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거나 “대한제국이 존속했다고 해서 일제보다 행복했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같은 똥 같은 이야기는 안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조금만 빨랐다면’하는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아이는 넘어지는 걸 겁내지도 않고 넘어졌다고 낙심하지도 않는다.”


걸음마를 배우는 딸을 바라보며 부부는 그 담담한 마음을 배운다. 그런 가족을 바라보며 나 또한 배운다. 지금은 비록 말도 똥도 아닌 이야기들이 듣고 있지만 낙심하지 않고 기다리면 모든 일이 제 자리로 돌아올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을 위해 이 뮤지컬을 응원하고 웃고, 즐기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위 캔 두 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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