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제시의 일기]가 바라본 역사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억합니다, 영원히!

by 지안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라는 외침이 서울 거리를 뒤덮었다. 1월 21일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종의 장례식을 이틀 앞둔 때였다. 탑골 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과 시민들, 국장을 지켜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까지 합류한 거대한 물결이 서울 거리를 뒤덮었고 곧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된다. 국내에서만 만세의 함성이 울렸던 것은 아니다. 만주와 상하이, 연해주와 시베리아, 미주 지역까지 우리 동포가 거주하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일본은 시위 군중들을 무력으로 진압한다. 주동자들을 체포했고 단순 가담자들에게는 태형을 가했다. 중심 조직이 없었던 시위는 힘을 잃었고 몇 달 후 완전히 진압되기에 이른다. 일본에 맞서 조직적, 결사적으로 항전하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생긴다.




이런 즈음 연해주, 서울,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정부를 세운 주체나 수립과정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든 정부가 ‘공화정’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이 1910년이니까 9년 만에 새로운 형식의 국가가 탄생한 셈이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중국은 서구 열강에 ‘조계지’라 불리는 일종의 치외법권지역을 내주게 된다. 상하이에는 프랑스, 미국, 영국이 설치한 조계지가 있었다.


1919년 당시 가장 조직적으로 움직인 곳은 중국 상하이에 있던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상하이 내 프랑스 조계 지역에 사무실을 마련한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프랑스 조계 지역을 선택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프랑스가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미 프랑스는 대한제국 시기 독일과 프랑스 공사를 지냈던 민영찬이 1906년 신청한 망명을 받아준 일도 있었다. 이후로도 프랑스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활동에 보이지 않는 도움을 준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의 독립 운동가들은 회의를 거쳐 ‘임시 의정원’이라는 이름의 의회를 구성하고 국호와 연호를 제정한다. 또한 헌법을 갈음할 임시 헌장 10개 조와 정강 6개 조를 통과시킨다. 오후 10시에 시작한 회의는 다음날 10시까지 이어진다.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다(그래서 4월 11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되었다).




이후 연해주의 국민 의회, 서울의 한성 정부, 상하이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논의에 들어간다. 몇 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정부의 이름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하고 서울의 한성정부를 계승하는 형식으로 임시 정부의 통합을 이루게 된다. 1919년 9월 6일에는 개정 헌법이 탄생했고, 9월 11일에는 신헌법이 공포되고 내각을 발표하면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가 열린다.


임시 정부는 임시 헌법 통해 독립 전쟁에 대비한 군사 제도도 도입했지만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해 2회까지 졸업생을 배출한 후 재정적 어려움으로 휴교 상태에 들어간다. 이 빈 곳을 채운 것은 각지의 독립군 단체였다. 이 시기 만주에는 대한국민회, 북로 군정서, 광복군 총영 등 46개에 달하는 독립군 단체가 존재했다.


외국 조계지에 세워진 임시 정부의 활동이 편안했을 리가 없다. 재정적으로 부족했고 일본의 감시는 심해졌다. 임시 정부의 활동이 위축되자 내부에서 개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임시 정부의 운명은 해결의 열쇠를 찾지 못한 채 오리무중의 상태로 빠져 들어간다.




제시의 아버지 양우조가 상해 임시 정부에 합류한 것은 이 즈음인 1929년이었다. 양우조는 중국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우리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와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혁신사’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한글 서적을 발간해 국내 및 해외에 배포하는 일등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과 별개로 임시 정부의 활동은 점점 위축되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 (위키미디어 펌 : https://commons.wikimedia.org)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 및 전승 축하 기념식이 열린 훙커우 공원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린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이 행사를 위해 모여 있던 일본군 수뇌부 한가운데 떨어진 것이다.




이 의거로 임시 정부의 상황은 하루아침에 바뀐다.


프랑스 조계는 더 이상 임시 정부를 감싸줄 수 없었다. 일본 경찰은 프랑스 조계지를 수색해 안창호를 비롯한 11명의 인사를 체포하고 서류를 압수한다. 도망친 요원들은 가흥으로 몸을 숨겼고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근거지를 옮긴다.


나쁜 결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반한감정이 일시에 사라지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은 “30만 명의 군인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감동한 중국 인민당 정부는 프랑스 조계지 밖으로 나와 더 위험해진 임시 정부 요인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했다. 김구 선생은 장제스를 직접 만나 독립운동의 지원을 약속받는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계속한다. 뤼양의 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만들어 군사 간부를 양성할 수 있도록 도움도 준다.


1937년 7월 26일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일본군의 이동에 맞춰 도시들이 빠르게 무너졌다. 이틀 만에 베이핑이 삼일 만에 텐진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상하이가 일본군에 점령당한 한 달 후인 12월 장제스는 수도 난징을 떠난다. 남아있던 중국군의 저항도 끝나고 12월 13일 마침내 일본군이 난징에 입성한다.


….. 점령한 순간부터 일본군 부대들은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1월 중순이 될 때까지 약 6주 동안 중국 중부에서 일본군 병사들은 학살과 강간, 약탈 등 끝없는 만행에 빠져 들었다. (중일전쟁 P161)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이어진 중일전쟁에서 사망한 중국인의 숫자는 낮춰 잡아도 1500만 명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난민은 8000만 명에 달했고 20세기 초반 건설된 주요 철도망과 고속도로 및 산업시설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일제 강점기가 우리의 역사 DNA에 각인되었듯 중일 전쟁은 중국인들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됐다.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일본에 대한 이미지로 제1위를 차지한 것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었고, 60.4%의 중국인들은 “일본은 다시 군국주의의 길로 갈 것”이라고 답변했다. 여기에서 나타나듯이 많은 중국인들은 여전히 일본에 대한 역사적 앙금을 떨쳐버리지 못하였으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한 이러한 역사 인식은 중-일간 정치적·정서적 우호관계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2003년 11월 13일 한겨레 21 기사 중)




이 거대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도 많은 중국인들처럼 대륙을 떠돌았다. 일본군을 피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어려운 시기에도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동에 도움을 주었다. 열차 편을 빌려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제공하기도 했다. 임시 정부 인사들은 진강에서 장사로 이동한다. 제시가 태어난 것은 바로 이 장사의 피난길이었다. 이후 광저우로 이동했던 임시 정부 식구들과 제시의 가족은 마침내 1940년 9월 충칭에 도착한다.


임시정부의 피난길

충칭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5일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한다. 양우조는 모녀를 기강에 남겨둔 채 충칭에서 거행된 기념식에 참석했다. 뮤지컬에는 이 장면에 대한 묘사도 있다. 9월 17일 임시정부는 국내외에 한국광복군 창설을 선포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미국 진주만을 기습한다. 미국이 자동 참전하게 됐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도 일본에게 선전 포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1943년 8월 29일 광복군 총사령부는 9명의 대원을 인도로 파견하고 그곳에서 영국군에 합류해 일본군에 대항한 전투를 벌인다. ‘인면지구 공작대’로 불리는 이 대원들은 1945년 귀환할 때까지 영국군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이런 말 하기는 뭐 하지만 정말 최선에 최선을 쥐어짠 것이다.




1945년 2월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이하 OSS) 소속 책임자가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 본부를 방문한다. 그리고 4월 임시 정부와 중국 전구 미군 총사령부는 ‘한미공동작전’을 승인한다. 1945년 5월부터 시안의 광복군 제 2지대에서 이른바 ‘독수리 작전(Eagle Peoject)’을 위한 훈련이 시작된다. 임시 정부 측의 이범석 장군과 미군 측 싸전드가 공조 체제를 유지하며 훈련을 진행했다.


‘독수리 작전’은 한반도의 5개 전략 지점(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으로 요원들을 침투시키는 국내 진공 작전이었다. 같은 해 8월 4일 교관들이 훈련생들의 훈련 성과에 만족, 이들의 작전 투입을 승인하면서 훈련은 종료됐다. 8월 7일 김구 선생 및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제 2지대장 이범석 등은 OSS 총책임자 도노반 소장과 만나 8월 20일 국내 진공 작전을 실시하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이 전쟁 참가를 선언하자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는 낙담과 탄식이 오갔을 순간이다. 김구 선생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몇 년을 애써서 참전을 준비했다. 산둥반도에 미국의 잠수함을 배치하여 서안 훈련소와 부양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본국으로 침투케 할 계획이었다……. 우리 측 광복군은 자기 임무를 달성치 못하고 전쟁이 종식되니 실망과 낙담의 분위기에 잠겼고…….(백범일지 P407)




이렇게 우리나라는 독립되었고, 중일 전쟁은 끝이 났다. 일본은 원자폭탄 피해국임을 내세워 '전범국가'에서 '전쟁피해 국가'로 과거의 역사를 세탁하고 있다. 제대로 된 사과도 반성도 없었다.


최근에도 중국 청년들은 여전히 일본에 증오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일본이 전쟁 당시 중국에서 저지른 행위에 대해 어떤 진정 어린 사과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반일 정서는 직접적인 계기가 없이도 어느 순간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있다. (중일 전쟁 P16)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중국의 입장은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중국과는 또 다른 문제가 내부에서 터져 나온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역사를 지워버리려는 공식적인 시도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임시 정부의 존재를 지운 채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됐다고 주장하며 ‘건국 60년’ 사업을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시도와 함께 이런 관점을 아이들에게 교육하기 위해 역사 국정 교과서를 편찬하려는 시도를 밀어붙이기도 했다. 다행히 실패했지만.


그런데 2023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저항했다 하더라도 일본과 국력 차이가 너무 현저해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완용이 비록 매국노였지만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전직 육군 준장 출신의 국방부 장관을 지켜보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찍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했다. 지금의 우리에게 날리는 죽비 같은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잊지 않았다. 우리는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기억한다, 영원히!


<참고자료>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시준 지음, 한울, 2021

여기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입니다. 은동진 지음, 초록비책공방, 2020

제시의 일기, 양우조. 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우리나비, 2019

중일전쟁, 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 글항아리, 2020

백범일지, 김구 지음, 나남출판, 2002


<참고 기사>

“대륙에 일본의 자리는 없다”, 한겨레21 제4 84호, 2003년 11월 13일

"이완용 어쩔 수 없는 측면 있었다"신원식. 27일 청문회, 경향신문, 2023년 9월 20일

일본의 역사 세탁과 히로시마, 전북일보, 2023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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