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안 Oct 07. 2023

철 지난 웃음의 무대

- 연극 <굿닥터>

'전문가가 알아주는 전문가'라는 분류가 있다. 예를 들어 가수들이 꼽는 가수라거나 기업인들이 알아주는 기업인, 요리사들이 선생님으로 모시는 요리사 같은 것 말이다. 훌륭한 재능을 가진 분들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들 중 일반인들에게 비슷할 정도의 소구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연극 [굿닥터]는 닐 사이먼(Neil Simon)이 존경을 담아 안톤 체호프의 유명한 단편 중 일부를 각색해 만든 코미디 작품이다. 1973년 첫 무대에 오른 원작에는 9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데 이번 우리나라 무대에는 그중에서도 8편의 단편을 골라 올렸다. 각 이야기들은 완결된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얽히거나 맞닿는 부분은 없다.




객석의 불이 꺼지기 전 누군가 무대로 걸어 나온다. 타자를 치던 남자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종이를 구겨버리고 대신 객석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마도 안톤 체호프인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 보이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8편의 작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각 옴니버스마다 부제가 붙어 있다. [재채기], [가정교사], [치과 의사], [늦은 행복], [물에 빠진 사나이], [오디션], [의지할 곳 없는 신세], [생일 선물]이 그것이다. 1860년 태어나 1904년에 사망한 체호프의 작품 속 시대 배경은 제정 러시아이니 연극 [굿닥터] 속 8편의 옴니버스에 나오는 인물들도 당연히 그 시대 사람들이다.


연극을 보는 내내 들었던 첫 번째 의문은 제목이었다. 왜 연극의 제목이 '좋은 의사'일까? 옴니버스 속 '치과 의사'라는 직업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연극 제목과는 관련이 없다. ('치과 의사'는 의사 보조와 치통을 앓는 신부의 이야기다) 아마 안토 체호프의 직업인 '의사'를 말하는 것일까? 제작사에서 제공하는 설명에도 이 부분은 없다. 혹시 알고 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아마 '안톤 체호프'라는 작가는 작가들이 꼽는 작가 혹은 연극인들이 꼽는 작가인 모양이다. 적어도 닐 사이먼이라는 작가에게는 그랬던 것 같다. 이 작품이 발표 당시에는 호평을 받았다고 하니 1973년의 사람들에게는

그랬을 수도 있겠다.


안톤 체호프라는 작가의 장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가는 것이다. 그의 단편집을 보면 주제도 다양하고 길이 역시 제각각이다. 어설프게 끝난 연애담부터 작은 감동이나 누구겪었을 법한 아픔들을 묘사한다. 어떤 이야기는 한 두장 정도로 짧고 어떤 이야기는 십여 장에 걸쳐 길게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도 비슷한 기조는 유지된다. 상관에게 재채기를 하고 마음을 졸이는 하급 직원의 이야기나 치통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신부 같은 인물들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한다.




그런데 그 정도로 충분할까? 그 정도 유머를 모아 '코미디'라는 느낌을 줄 수 있을까? 19세기말의 유머를 잘 꾸며 무대에 올리기만 하면 21세기 관객들에게도 통할 것이라고 믿은 것은 너무 게으른 생각은 아니었을까?


물론 115분의 시간 중간중간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긴 한다. 폭발하는 웃음이 아니다. 그야말로 취향을 타는 킥킥 거림이다.


아주 짧게 지나가는 에피소드도 있고 제법 긴 이야기도 있다. 속마음을 노래로 표현한 에피소드도 있고 작가가 겪은 일이라며 직접 보여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맥락 없는 이야기들이 '어 어 어' 하는 사이에 지나간다. 매우 오래전 폐지된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기분이다. 작가가 혹은 연출가가 안톤 체호프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는데 그것을 일반 관객들에게 강요하는 느낌이다. 낡고 늙은 이야기에 맞장구를 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배우들에 관해서는 짧은 멘트로 부족하다. 작가로 나오는 김수현 배우를 제외하고 나머지 배우들은 3명 이상의 배역을 소화한다(아, 노래는. [늦은 행복] 속 노래는 좀 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는지). 배역이 바뀔 때마다 좀 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다. 김수현 배우의 연기도 훌륭했다. '작가'라는 인물이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든 일등공신은 김수현배우였다.


8개의 에피소드를 연기해야 하다 보니 무대는 사무실이었다 서재로, 은행에서 공원으로 휙휙 바뀐다. 그럴 때마다 무대를 정리하는 것도 배우들의 몫이다. 배우들만 보자면 이 연극에 대해 야박하게 말하는 일은 죄악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뭐.


안톤 체호프의 작품에 특별한 애정을 지니신 분들께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코미디'라는 광고를 보고

어떤 웃음 코드를 기대하는 분이 있다면 권하지 않겠다. 배우들의 열연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신 분들께도 추천한다. 다만 그 열연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아쉽다. 이 연극은 11월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시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실을 아는 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