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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Sep 28. 2023

진실을 아는 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제목이 영 입에 붙지 않았다. ‘타오르는’과 ‘어둠’이 나란히 있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극장 좌석에 앉을 때까지도 제목이 가물가물했다. 어둠 어쩌고 하는 거였는데, 정확히 뭐였더라. 내가 이 뮤지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원작이 따로 있다'는 것과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한다는 사실뿐이었다.




무대는 맹인학교다. 목소리와 체취로 서로를 구분하고, 익숙한 계단과 모퉁이를 스스럼없이 걷는다. 적어도 이 공간만큼은 안전한 곳이라고 아이들은 믿는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장애에 대해 불편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행복해 보인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인 도냐 페삐따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철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지 말고 강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아이들은 신의 계시처럼 도냐 페삐따의 말을 경청한다. 방학을 끝내고 막 새 학기가 시작되려는 참이다.


그리고 전학생 이그나시오가 등장한다. 기존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맹인이다. 그러나 전학생은 기존 학생들과 달리 지팡이를 짚고 있다. 탁탁 바닥을 치며 기분 나쁜 울림을 건물 이곳저곳에 퍼뜨린다. 이 학교는 안전하니 지팡이는 필요 없다고 아이들은 말하지만 전학생은 오히려 거칠게 움켜쥔다.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아이들과 사나운 전학생의 등장을 바라보다 150분짜리 뮤지컬의 절반이 지나가 버렸다.




볼 수 없는 것을 긍정하며 유토피아 같은 학교에 만족하는 모습으로 어떤 맹인학교를 그리는 것이 작가의 진정한 목표였을까? 그럴 리는 없다. 할 수 없이 인터미션 시간을 이용해 원작에 관한 정보를 찾았다.




원작을 쓴 작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Antonio Buero Vallejo)는 1916년에 태어난 스페인의 극작가다. 화가를 직업으로 삼고자 했지만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이 변한다. 감옥에 갇혀 죽을 뻔했던 작가가 1950년에 발표한 작품이 이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In the Burning Darkness)]다. 그러면 그렇지.


1950년이라면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프랑코 장군의 독재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 게다가 작가는 이미 내전에 휩쓸려 죽을 뻔한 경험이 있다.


2부가 시작되지 않아  불 꺼진 텅 빈 무대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무대가 이해됐다.




1950년의 스페인은 이미 내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사라진 공간이다. 프랑코는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반대파라면 최선을 다해 처단했다. 이 기간 고향 스페인을 버리고 떠난 사람의 숫자도 엄청나다. 남겨진 사람들은 프랑코의 독재가 펼쳐지는 가운데 그의 동상이 온 나라에 세워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했고, 현실에서 눈을 돌려야 했을 것이다. 마치 맹인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믿는 학생들처럼.


하지만 누군가는 현실을 '알았'을 것이다. 전학생 이그나시오처럼. 그의 말에 아이들은 흔들린다. 그것은 이그나시오의 힘이 아니다. 진실이 갖는 힘이다. 그의 말은 납득할 수 있고 명료했으며 사실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 말은 진짜니까.


이제 '타오르는'과 '어둠'이 동시에 들어간 문장도 이해가 됐다. 현실을 외면한 사람들이 머물러 있던 인공의 세상이 이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선택의 문제가 생긴다. 전학생을 만나기 전 행복했던, 그러나 거짓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사는 것과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 중 선택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진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희망'을 갖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불행은 품고 있던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희망조차 없다면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맹인학교에서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도냐 페삐따 선생님이 만들어 낸 세상처럼 말이다.


도냐 페삐따는 볼 수 있는 자신이 볼 수 없는 아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자신의 말이 옳다고 주장한다. 많은 일을 겪고 난 후의 까를로스는 말한다.


아니요, 선생님은 볼 수 없어요. 본 것을 말할 수 없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진지하고 무거운 뮤지컬이다. 어렵고 심오한 주제의 희곡을 뮤지컬로 만든 힘이라니.......


무대는 간결하고 상징적이다. 도냐 페삐따 선생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손을 흔들고 걸음을 헤매고 길을 잃는다.


도냐 선생님에게 제대로 그루밍당하는 까를로스 역의 양희준 배우나 선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후이나 역의 주다은 배우도 훌륭했지만 역시나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전학생 이그나시오를 맡은 홍승안 배우가 없었다면 흥미가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무대도 연기도 흠잡을 것이 없다. 다만 주제에 따라, 혹은 '무릇 뮤지컬이란 흥과 신이 넘쳐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호불호가 갈릴 법하다.




하지만 이 뮤지컬을 보며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일은 유익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맹인 학교에 살고 있다. 권력을 지닌 누군가가 만들어 보여주는 세상 - 그것이 독재자가 됐건, 자본주의 최종 병기가 됐건, 알 수 없는 종교에 의한 것이건 기타 등등- 에 우리는 익숙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혹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 뮤지컬은 11월 26일까지 링크아트센터 페이코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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