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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Oct 18. 2023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가?

- 연극 [러브 앤 인포메이션]

같은 옷을 입은 다섯 명의 배우가 인사를 한다.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는 것 같더니 다시 암전. 불 켜진 무대에는 두 명의 배우만 서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늙었는지 젊었는지 모른다. 혹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나에게 그 얘기해 줄 거지?”


비밀을 자신에게 털어놓으라고 한 사람이 말한다. 상대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든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쓸모없는 말일뿐이라고 설득하지만 도무지 통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말실수. 이제 두 사람의 상황은 역전된다.


“괜찮아. 말할 필요 없어.”

“아냐, 말할게. 사실은……”


첫 장면에서 그야말로 빵 터져 버렸다. 살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나눴던 대화를 녹화해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우리는 생각과 감정(인포메이션 Information)을 말(수화를 포함해)을 통해 누군가에게 전달한다. 텔레파시 같은 것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한낮 평범한 사람인 나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대화’만이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 거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세계는 CF와 허구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한다.


그럼 그렇게 입 밖으로 나온 정보는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이 될까? ‘사랑해’라는 말은 어떻게 전달이 될까? ‘나는 널 많이 사랑해.”, ‘나는 널 죽일 만큼 사랑해.”, “난 걜 위해서는 내 손이라도 자를 수 있어.” 이렇게 말한들 과연 제대로 전달됐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 연극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랬어? 그렇게 하니까 잘 되디?




이 작품은 영국의 극작가 캐롤 처치(Caryl Churchill)가 2012년에 쓴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 90분의 시간 동안 분절된 장면이 이어진다. 앞의 장면과 이어지는 장면 사이 아무 관련이 없다. 보라색 머리 배우와 이야기를 하던 배우가 말을 멈추고 몸을 틀어 갈색머리 배우와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미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 것이다. 배경을 바꿀 필요도, 음악이 따로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무대에는 의자 모양으로 만든 4개의 화면(8개의 의자와 4개의 화면)이 걸려 있고, 의자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물과 의자, 테이블 몇 개가 있을 뿐이다. 20세기인지 21세기인지 17세기인지, 미국인지 한국인지 조선인지 구분할 방법은 없다.


4개의 화면에는 배우들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암시하는 문양이 떠 있다. 예를 들어 놀이 공원이라면 기차 레일, 식당이라면 포크와 나이프 같은 식이다. 이따금 무대 밖 기둥에 글씨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배우들은 대화 사이사이 구조물을 바꾸고 필요하면 끌어다 쓰고 멀리 던져 놓는다. 이런 것쯤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투다.




이 연극은 한때 문학에서 유행했던 장르인 아포리즘을 떠오르게 했다.


툭 떨어진 장면은 배경이 지구인지 화성인지, 할머니가 그랬다는 것인지 어제 내 친구가 나눈 이야기를 옮긴 것인 지 알 수 없다. 혹은 알 필요가 없다. 그저 나누는 대화에 집중하면 된다. 내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면 밑줄을 긋고 그렇지 않으면 책장을 넘기면 그만이다. 책 한 권에 마음에 드는 구절이 하나 있다면 우리는 그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이야기는 반드시 기승전결의 구조로 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 분들께는 견디기 힘든 90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펼쳐지는 대화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연극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 것 같아 자제하겠지만 당신의 마음에 드는 대화 하나 정도는 꼭 건질 수 있다는 것에 어제 귀갓길에 사서 먹다 남은 만쥬 하나를 걸겠다.




작은 극장이라 어디에 앉아도 배우들의 표정은 잘 보인다. 다만 무대 앞 기둥에 걸린 글씨를 읽자면 오히려 뒤쪽에 앉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다. 두 개의 기둥에는 각각 다른 이야기가 나타났다 사라지므로.


다섯 명의 배우는 합이 잘 맞았다. 오랜만에 권은혜 배우를 무대에서 만나 행복했다. 저기 혹시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다시 안 하십니까? 꼭 다시 보고 싶습니다!


권정훈 배우와 이주협 배우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역시 맛난 연기를 보여줬다. 자연스러운 황은후 배우의 연기도 좋았고 성수연 배우는 언제 봐도 귀엽다. 헤어졌다 다시 만난 연인을 연기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요, 그 오솔길과 버스를 잡기 위해 뛰어가던 것 나도 본 것 같아요.




처음 이 연극의 제목 [러브 앤 인포메이션]을 봤을 때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연극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거를까 하다가 러브와 인포메이션 사이 ‘앤드’에 마음이 움직여 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이 연극은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아니지, 사랑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그 밖의 다른 소통과 이해에 관해 말한다. ‘앤드’를 스쳐 지나가지 않은 나 자신을 칭찬한다. 이 연극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11월 4일까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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