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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Nov 15. 2023

그래 난 달라, 근데 그게 뭐?

- 뮤지컬 [안테모사]

안테모사(Anthemoessa)는 그리스 신화 때부터 등장하는 세이렌(Seiren)들이 산다는 전설의 섬이다. 세이렌은 바다에 사는 일종의 요정들로,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뱃사람들을 유혹한다고 알려져 있다. 호메로스가 지은 오디세이아(Odysseia)에는 1년 동안 자신과 살았던 오디세우스와 작별하며 요정 키르케(Kirke)가 건네는 충고가 나온다.


“세이렌 자매가 풀밭에 앉아 낭랑한 노랫소리로 호릴 것인즉 그들 주위에는 온통 썩어가는 남자들이 뼈가 무더기로 쌓여 있고 뼈를 둘러싼 살갗은 오그라들고 있어요.”


세이렌은 뱃사람 그러니까 바다에 있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요정이다. 유혹해서 그들을 잡아먹거나 요긴하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신을 뺏고 썩어가게 놔 둘뿐이다.


키르케는 다른 선원들의 귀에는 밀랍을 이겨 발라서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들고, 오디세우스 자신은 돛대에 몸을 고정해 움직일 수 없게 한 후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섬을 지나가라고 말한다. 두려움 때문에 거부하기에는 세이렌의 노래가 몹시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이렌은 강의 신 아켈로스(Achelos)가 시와 노래의 여신인 무사(Mousa)와 관계해 낳은 딸들이다. (강의 신에게서 태어난 딸이 왜 바다에 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와 노래의 여신의 자손답게 노래에 어마무시한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세 딸의 이름은 페이시노에(Peisinoe), 아글라오페(Aglaope), 텔크시에페이아(Thelxiepeia)다. 이 뮤지컬 [안테모사]에는 ‘페이시노에’와 ‘몰페’, ‘텔레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대강 누구에게서 가져온 이름인지 짐작이 간다. ‘재능이 있는 여성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상징하는 또 다른 이미지는 ‘마녀’다. 이렇게 해서 깊숙한 숲 속에 자리 잡은 [안테모사]라는 집에 ‘마녀’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의 배경이 탄생한다.




뮤지컬은 어느 마을에서 시작한다. 평범하고 평화롭고 조용하고 아무 일없는 그런 마을. 그 마을에 떠돌이 남자가 찾아온다. 우체부가 된 떠돌이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일은 안테모사라는 집에 새로 부임한 시장이 보내는 편지를 전하는 것이다.


마을 끝 자작나무가 늘어선 숲을 지나 한참을 가야 쓰레기와 고물로 가득 찬 집, 안테모사에 도착할 수 있다. 거리가 먼 것도 문제지만 이곳에는 마녀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누구도 가까이 가려하지 않는다. 마을 토박이인 다른 우체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떠돌이 제논에게 편지 배달을 시킨다.


안테모사에는 사냥꾼인 페이시노에, 고물을 줍는 텔레스라는 할머니와 알비노 증상으로 인해 온몸이 하얀 소녀 몰페가 살고 있다. 페이시노에와 텔레스에게는 마을에서 쫓겨난 과거가 있다. 선천적으로 멜라닌 색소가 없는 몰페의 외모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즉 안테모사에 살고 있는 세 사람은 마을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편지만 전하려던 제논은 어쩌다가 그들의 식탁에 함께 앉게 된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페이시노에는 제논이 가져온 시장의 편지를 다른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한다. 안테모사를 철거하겠다는 예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예고가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세 번째 예고장을 들고 제논이 찾아온다. 그리고 제논은 안테모사에 점점 애정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의 배경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뮤지컬은 판타지 동화 같은 느낌을 준다. 순수 국내 제작진이 만든 작품으로 2019년 초연됐고 이번이 세 번째 무대다.


수십 개의 페트병으로 천정을 채운 안테모사가 무대의 중심이다. 두 할머니와 소녀가 사는 집은 누군가가 버린, 하지만 과거에는 추억과 의미가 있었던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안테모사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우체국과 마을, 상점, 시장의 집무실도 등장한다. 작은 무대를 최대한 활용하지만 아무래도 좁다. 객석에 비해 낮게 위치한 무대 앞 쪽에 배우가 앉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쓸데없이 앞에 앉은 관객에게 억하심정을 갖게 된다. 조금 더 큰 무대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무대가 작아서 불만이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흠잡을 것 없는 작품이었다. 판타지 동화답게 결론이 예측가능하다. 아름다운 동화가 자연스럽게 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된다. 어렵고 골치 아프고 세상 복잡한 이야기는 다른 무대가 보여주겠지. 적어도 이 숲 속 안테모사에서는 편한 마음으로 노래와 춤, 그리고 이야기에 집중하면 된다. 작고 귀여운 동화만 상상해도 곤란하다. 극이 끝날 때쯤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재미와 감동이 함께 있는 작품이랄까.


뮤지컬의 테마송은 몰페와 제논이 함께 부르는 [난 달라]라는 노래였던 것 같지만, 내 귀를 사로잡은 것은 텔라스가 부르는 [너무 예뻐서]다. ‘내가 너무 예뻐서, 어디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다 예뻐서……’에서 빵 터져 버렸다. 텔라스 만세~ 고은영 배우 브라보!! 전반적으로 노래들이 다 아름답지만 안테모사의 가족들, 페이시노에와 텔라스, 몰페의 화음은 다시 한번 듣고 싶을 만큼 우아하고 매력적이었다.




알비노 소녀 역할을 한 강지혜 배우는 원래 그런 모습인 듯 자연스러웠다. 믿고 보는 송유택 배우는 이번에도 송유택 했다. 무대에만 올라오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이 귀여워진다. 힘찬 페이시노에를 연기한 장예원 배우도 훌륭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고은영 배우에게 푹 빠진 무대였다. 너무 예쁘시네. 참 나.


누구나 마음속에 동화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아름답고 해피앤딩이고 사랑스러운 동화 속 세상 말이다. 현실은 정직한 사람이 결국 이기는 것도 착한 사람이 복 받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더 마음속 깊은 곳에 그런 동화 하나쯤 품게 되는 것 같다. 남들과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누구라도 가족처럼 따뜻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그런 곳. 그곳이 바로 안테모사 속 세상이다. 이 뮤지컬은 11월 22일까지 정동세실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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