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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Jun 15. 2024

17세기나 21세기냐 그것이 문제다

- 연극 <햄릿>

텅 빈 무대 뒤로 유리로 된 벽이 있다. 벽 사이에 문이 있어 배우들이 등장하거나 퇴장할 수 있다. 유리는 때에 따라서는 거울처럼 무대를 반사하기도 하고 이따금은 투명하게 벽 뒤 배우들의 연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불이 켜지면 의자를 든 배우들이 무대 위로 등장한다. 그들이 말없이 퍼포먼스를 펼치는 동안 극 중 극단 배우들인 또 다른 4명의 등장인물이 그들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분위기를 감지하고 징조를 느낀다. 즐겁고 환상적인 느낌은 아니다. 비극이 시작될 것 같은 불안한 기운이 극장을 가득 채운다. 


마지막 장면에 정확히 같은 구도로 모든 배우들이 무대에 오른다. 말하자면 이 연극은 수미쌍관식 구조를 보여준다. 3시간 가까이 진행된 햄릿의 복수가 끝난 뒤 이들은 행복해졌을까? 즐거운 표정이 되어 있을까? 관객이 진정으로 느껴야 할 것들은 아마도 그곳에 있는 것 같다. 




이 연극은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햄릿>을 원작으로 한다. <햄릿>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줄거리 정도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덴마크 왕국의 왕이 죽은 얼마 후 그의 동생 클로디어스는 왕이 되고, 선왕의 부인이었던 거트루드와 재혼한다. 선왕과 거트루드의 아들인 햄릿은 모든 상황이 혼란스럽다. 선왕의 유령이 나타난다는 말을 듣고 성벽으로 달려 나간 햄릿은 마침내 유령과 만난다. 선왕은 자신이 동생 클로디어스에게 독살되었으며 복수해 달라고 말한다. 


이후 햄릿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오필리어마저 속이며 선왕의 말이 사실임을 알아보기 위해 궁전 안을 배회한다. 마침 성을 찾은 극단을 시켜 ‘곤자고의 암살’이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도록 한다. ‘곤자고의 암살’은 영주의 동생이 곤자고를 죽이고 그의 아내까지 차지한다는 내용으로, 햄릿은 극 중 살해 장면을 클로디어스가 한 독살처럼 바꿔 무대에 올린다. 연극을 지켜보던 클로디어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본 햄릿은 유령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확신한다. 


햄릿이 미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거트루드는 자신의 방으로 아들을 불러 대화를 시도한다. 햄릿은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를 비난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던 중 상황을 훔쳐보고 있던 클로디어스의 신하이자 오필리어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를 실수로 살해한다. 사실을 알게 된 오필리아는 미치고 거리를 떠돌다 물에 빠져 죽는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즈는 햄릿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클로디어스는 독을 묻힌 칼을 레어티즈에게 주며 햄릿과 검술시합을 하게 한다. 독 묻은 칼로는 모자라 독이 든 음료수를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살을 알게 된 거트루드는 아들 대신 독이 든 음료수를 마신다. 햄릿은 독이 묻은 칼에 찔리지만 격해진 시합 도중 칼이 바뀌는 바람에 레어티즈도 칼에 찔린다. 레어티즈는 죽어가며 이 모든 상황을 햄릿에게 알려주며, 햄릿은 칼로 클로디어스를 찌르고, 독이 든 음료를 입 안에 들이붓는다. 이제 그곳에는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 햄릿과 레어티즈의 시신이 남게 되었다. 




즉 이 이야기는 ‘복수’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햄릿이 똑 부러지게 복수를 준비한 것은 아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라며 소심하게 고민하는 동안 사건이 벌어지고 또 다른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이런 결과에 도달한다. 햄릿의 고민은 독백으로 표현된다. 독자적으로 복수를 준비했다며 독백이 이렇게 길 필요도 없다. 행동보다 고민이 너무 많은 인물이 햄릿이다. 연극 내내 그 부분은 사무치게 느낄 수 있었다. 


3시간의 연극 중 1/3은 햄릿의 고민에 할애되었다. 햄릿은 독백하고 중얼거리고 고뇌한다. 마치 셰익스피어가 썼을 법한(원작에는 없는 말들이 많다) 말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과의 대사는 지극히 현대적이다. 특히 박지일 배우가 연기한 ‘폴로니우스’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웃음 포인트도 있고 복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한다. 마치 햄릿의 머릿속 세계와 타인과 만나는 세계가 동떨어진 세상처럼 보인다. 원작을 참고해 다시 써진 이야기임에도 어쩐지 어색하고 억지스럽다. 


이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거의 모든 배우가 주연급이다. 처음 캐스팅을 보고 어떻게 이들을 한 무대에 모았지 싶었을 정도다. 그 정도의 배우들이 모였으니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다. 단지 한 명 한 명의 연기는 훌륭하지만 모아 놓으면 제대로 섞이지 않는다. 이것이 연출의 문제인지 대본의 문제인지 둘 다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두 달 이상 진행될 공연인데 어떤 조치가 필요할 것 같다. 




원작에서 모두가 죽고 죽임을 당한 후 그곳을 정리하는 것은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다. 그는 덴마크와 왕과 왕자가 죽은 현장을 보자마자 자신이 덴마크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받아들여진다. 복수도 죽음도 다 부질없다는 느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 연극 <햄릿>에는 그 부분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관객에게 복수와 죽음, 그 과정과 결과를 지켜본 느낌을 묻는다. 마지막 장면을 그래서 더 마음에 남는다. 


단순한 무대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조명이다. 이 작품에서 조명은 한 명의 배우처럼 제대로 할 일을 해낸다 오롯이 극을 집중하게 해 준 조명팀의 노고에 감사한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잘만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될 수 있는 요소다. 하지만 세대에 따라 성량도, 발성도 다르다 보니 제대로 합을 맞추지 않으면 저고리 몸통에 블라우스 소매가 달린 이상한 옷처럼 되어 버린다. 연극을 보는 내내 그것이 좀 아쉬웠다. 


햄릿 역의 강필석 배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긴 시간 거의 홀로 극을 이끌었다. 덴마크 왕궁을 찾은 배우 중 한 명으로 등장한 박정자 배우는 놀라웠다. 그의 등장 만으로 무대에 생기가 돌고 대사 한 마디에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배우의 힘인가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폴로니우스를 연기한 박지일 배우와 호레이쇼를 연기한 정환 배우 덕이 이 연극은 현실적이고 생기 있어졌다. 이들이 없었다면 21세기 무대 위에 오른 이 연극은 17세기 셰익스피어의 원작처럼만 느껴졌을 것 같다.  


일단 차려진 것은 많은 밥상이다. 매일이 새로울 수 있는 것이 연극이고 배우들의 공력이 대단한 작품이니 회차를 거듭하면서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 연극은 홍대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9월 1일까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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