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질문
멕시코를 떠올리다 보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멕시코 칸쿤을 스쳐지나(우리는 신혼 여행자가 아니니까) 배낭 여행자의 천국이라고 알려진 플라야 델 카르멘에 머물렀다. 안전한 쇼핑타운과 다양한 여행 상품이 있고 세노테를 보러 가기도, 치첸이사를 둘러보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한국인이 드물었다.
밤이면 문을 여는 게스트 펍에는 살짝 풀린 눈의 외국인 여행자들이 가득했고 그들을 피해 일찌감치 숙소에 누워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 앞에는 이 십 대 한국인 여성 둘이 서 있었다.
“배낭여행을 온 지 좀 돼서, 우리 말고 한국 사람이랑 얘기를 좀 하고 싶어서요. 마침 데낄라도 넉넉한 데 혹시 한 잔 하지 않겠어요?"
만취는 아니고, 예의 바르게 술이 취한 상태였다. 머뭇거리는 딸을 앞세워 그들의 술자리를 찾았다. 일행은 총 세명이었다. 삼십 대 초반의 남자와 이십 대 초반의 여자 둘. 이들은 아르헨티나에서부터 일행이 되어 여행 중이라고 했다. 남자도 술이 조금 된 상태였는데, 나를 보자 잊었던 사장님을 만난 듯 벌떡 일어섰다. 4년 정도 회사를 다니고 퇴직한 상태라 하니 그럴 만도 했다.
한국 대학을 다닌다는 여성과 남미에서 어학연수 중이라는 여성이 딸의 나이를 듣는 순간, 술판의 성격이 결정되었다. 딸은 ‘대학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회란 대학에 비해 얼마나 힘든 곳인지’, ‘어학연수를 해야 하는 이유 ’와 ‘여행에서 얻어야 하는 것들 ’에 관해 일장 연설을 들었다. 독한 마음을 먹고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하나 없는 남미의 어느 곳에서 힘들게 공부했다는 말을 했을 때는 일견 ‘그렇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대체 그 얘기를 몇 번을 우려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느냐’며 어학연수 중인 여자의 잔을 뺐으며 남성이 내 눈치를 볼 때까지는.
몇 번이고 화제를 돌려보려 했지만 허사였다(이런 쪽으로는 내가 좀 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생각으로 버티던 내게 남성이 갑작스레 술판을 정리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정도였다. 데낄라 한 병이 바닥났고(나는 한 잔정도 얻어 마셨고, 내 딸은 그야말로 ‘알쓰’여서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여자분 둘이 비우신 거다) 술판 초반만 해도 얼굴이 발그레하던 남자는 술 마시기 전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내 인생에서 본 가장 어리고 할 말 많은 꼰대였다.
입과 성대가 멀쩡한 한, 우리는 늘 할 말이 있다. 과묵하다고 평가받는 사람도 집에서, 친구를 만나서, 혹은 애인 앞에서 떠들게 마련이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인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뭔가를 가르쳐주겠다는 결기가 대단하다.
하지만 조금만 들어봐도 내용이 비슷하다. ‘과거’의 이야기다. 내가 예전에 그런 일을 했고, 저렇게 극복했으며,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과거에 ‘이렇게 느꼈어’도 없다. 아마 잊은 것이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과거를 기억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꼰대가 될 확률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하여 말이다.
65세로 정년을 연장할 것이라는 기사가 나오면서(뒤집으면 연금을 주지 않겠다는 소리다) 사무실이 보글거린다. 임금피크제가 도입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인데(5년 받고), 또 이야기가(5년 더 받아라!) 나오기 때문이다.
임금피크제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5년 더 일할 수 있다니 좋잖아, 같은 의견이 많았다. 청년 세대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말은 신문 같은 곳에서나 나올 뿐, 실상 자식들(이들이 청년세대다)이 졸업할 때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괜찮은 조치였던 거다. 삼십 대 초반에 결혼을 한 남성들의 아들이 돈을 벌자면(이 아들도 군대 다녀와서 입사하려면 얼추 30은 돼야 하니까) 60까지는 일하고 싶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65세 앞에서는 말이 다르다. 십수 년 전 유럽 사람들이 정년 연장에 반대하는 데모를 한 이유를 이제야 동감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럼 과연 그 말을 한 사람은 65세 이전에 회사를 그만둘까?
내 연차가 쌓인 만큼 정년으로 퇴직한 선배의 숫자도 엄청나다. 다들 회사를 그만두고 더 이상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어딘가에서 일을 한다. 정년퇴직을 하고 ‘그야말로 쉬는’ 선배는 딱 하나다. 인터넷 사이트에 무협소설을 연재하시느라 바쁘다.
퇴직 이후에 관해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것저것 남 이야기를 해대다가 결국 조그마한 목소리로 결론을 낸다. “내가 뭐 할 줄 아는 것이 있어야지.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것을 어떻게 견뎌? 가족들이랑도 계속 있음 싸우기 밖에 더해?”
여행에도 스킬이 필요하고, 노는 것에도 열정이 필요하다. 주어진 시간도 어쩌지를 못해서야 100세 시대도, 은퇴 후 찬란한 노후도 다 소용이 없다. 그저 새로 들어오는 직원들에게 ‘회사 생활은 이렇고’, ‘직장 상사에게는 저렇고’ 하는 편이 재미도 있고 보람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슬프다.
플라야 델 카르멘에서 삼십 대 초반의 남성분은 연신 내게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죄송하다고. 뭐 너님이 미안할 일은 아니지요, 술이 문제라고 합시다! 벌써부터 질린 얼굴이 되어 있던 딸과 자리를 뜨기 전에 술을 더 마시자며 나를 붙드는 이십 대의 어학연수자에게 물었다.
“연수도 여행도 재미는 있었어요?”
“꼭 재미있어야 하나요? 인생은 힘든 거예요. 난 스페인어를 잘해요. 그거면 됐죠.”
발음이 꼬인 채로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 재미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권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재미라도 있는 일을 추천해야 한다. ‘내가 힘들게 했으니, 너도 고생스럽지만 해’는 너무하다. 우리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재미없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살기 위해서는 아닐 거라고 나는 믿는다. 얼렁뚱땅의 재료로도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레시피가 소중한 것이지, 몸에 좋은 재료로 만든 맛없는 음식은 사절이다. 백세시대도 좋고 정년 연장도 좋고 다 좋은데,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면 재미있는지, 시간이 나면 뭘 하고 놀 지 아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더 어린아이들을 붙들고 꼰대 짓 할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아, 그런데, 정년 65세란 너무한 것 아닙니까? 55세까지 3교대할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정말 이런 내가 너무 걱정입니다.
- 오늘의 질문 : 어떤 때 가장 즐거우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