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조언
영화 [기생충]에서 부잣집 과외 선생이 된다는 아들에게 기택은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고 말한다. 미래 없이 현재를 소비하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계획 없이 살면 기택처럼 된다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했다.
계획. 모름지기 ‘영민한’ 인간이라면 계획이 있어야 한다. 대학을 가려면 어릴 때부터 준비된 긴 허들이 기다리고 있고, 입사를 하려면 갖춰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혼은 말할 것도 없다. 사기를 치기 위해서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 준비해 둔 계획이 있어야 성공의 확률이 높다(고 영화 같은 곳에서는 말한다).
내가 ‘계획’이라는 것을 언제부터 세웠는지 정확히 기억난다. 재수를 막 끝냈을 무렵이었다.
학력고사 세대여서 만점이 340점인 시험을 봤다. 그중 20점은 체력장 점수여서, 여름방학 전부터 운동장에서 구르는 것과 야간 자습을 병행해야 했다. 그 20점을 못 얻는 것은 학교의 문제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선생들은 한여름 땡볕 아래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정해진 점수를 따게 하기 위해 맹렬히 연습시켰다.
이제 320점. 야간 자습이란 이 점수를 위해 마련된 시간이었다. 그러나 같은 프라이팬에 올린다고 고기가 똑같이 익지 않는 것처럼, 누군가는 고득점을 향한 투지를 불태웠고 다른 이는 불기가 없는 곳으로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녔다. 당연히 나는 후자라서 고3 학력고사 성적표의 점수는 체력장 20점을 포함해서 두 자리 숫자였다.
대학 가기는 글렀고, 내가 부모라면 재수를 권할 수도 없는 점수였다. 시험지 없이 대충 답지에 표시만 해도 그 점수는 나온다고 지금의 나는 물론이고 예전의 나도 생각했다.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고,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계획’도 없는 사람이 낼 수 있는 평범한 결과였다. 대학을 가지 않고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도 없는 것은 큰 문제였지만.
부모님 입에서 ‘재수’라는 말이 나왔을 때 역시 ‘그런가 보다’ 했다. ‘대학도 떨어진 주제에 고등학교 졸업식은 왜 가느냐’는 부친의 말씀 중 틀린 곳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재수.
150여 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은 학원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얼핏 지금껏 살아온 것과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삭발하고 맨 앞줄에 앉은 덩치 큰 재수생들과 그 주위로 포진한 30대는 됨직한 군 필자들의 포스가 너무 강했던 탓도 있다. 들어온 이유는 다르지만, 개중에는 ‘계획’이 있는 학생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의실에서 떠든다든가 소음을 낼 때면 바로 응징을 당했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었다.
그해 받은 학력고사 점수는 200점 중반 대였다. 학원 담임부터 가족까지 나의 성실함을 칭찬해주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이승에서 받을 수 있는 '최선은 아니지만 최고의 점수'라는 것을. 영어와 수학처럼 기초가 필요하고 많은 노력이 소요되는 과목은 접어두고, 빠른 결과를 낼 수 있는 암기과목 위주로만 얻어낸 점수였기 때문이다. 성실한 것이 아니고 그저 요령이 좀 생겼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해 낙방이 확정됐을 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후기대학까지 떨어졌다는 소식은 모친이 전해주었다. 지금도 당시 상황이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가게를 운영하던 부모님은 저녁 늦게 함께 퇴근했는데, 현관 입구로 마중 나온 오빠와 나를 바라보다 웃으며 한마디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멋쩍은 표정이었던 것 같다. 발표 전날이라 미리 대학에 전화를 걸어 합격여부를 확인한 것이다.
“표정들 보니 아직 모르나 보네. 다 떨어졌어. 몰랐어?”
두 분은 이 말을 남기고 표표히 사라졌고, 나는 내 방으로 오빠는 본인의 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이후에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이다.
20여분 뒤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오빠가 들어왔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를 끌어안고 끊어지는 문장으로 이렇게 말했다.
“왜 이 집에는 널 위해 울어주는 사람 하나가 없냐?”
오빠는 온몸을 격하게 떨며 울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부친에게 맞았을 때에도 이렇게 울지는 않았다. 안긴 상태로 오빠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떠올린 생각은 하나였다.
‘이거, 굉장히 큰일인 거구나’.
그렇게 한참 울던 오빠는 울음이 잦아들자 아무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혼자 방에 남자, 내 앞의 상황, 내게 벌어진 일, 그리고 앞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일들이 천천히 그려졌다. ‘계획’이라는 것을 시작한 시점이 바로 여기였다. 현재 나의 상태, 사회에서의 위치, 앞으로 선택하거나 혹은 선택하지 않을 것으로 인해 따라올 미래. 그런 모든 것이 떠올랐다.
딱히 좋은 위치에 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생각 속의 나는 그보다 더 나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그리는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하며 지금도 뭔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희망도 없고 계획도 없이 혹은 그저 재미있게 놀겠다는 마음조차 없이 살고 있었다. 열심히 했다는 자각도 없고 잘해보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한마디로 인생 전체가 무기력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적어도 오빠만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너는 그보다는 훨씬 가치 있다고, 적어도 오빠가 눈물을 흘리고 슬퍼해줄 만한 인생이라고. 아, 이런.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때였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슬퍼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런 경험은 단 한 번이면 족하다. 마치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다. 일단 몸에 깃들면 잊혀지지 않는다. 오빠는 나보다 내 상황을 적확하게 이해했고, 감정이입했으며, 그 결과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동생으로서, 인간으로서의 나를 완벽하게 받아들여준 것이다. 그런 사람을 더 이상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다른 의미로 목표 같은 것이 생겼다. 1년만 공부를 더 해보자고 오빠가 말했을 때, 두말없이 받아들인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기꺼이 삼수의 지옥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단 한 번이라도 진정으로 이해받은 경험을 가진 한,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사랑해줬다는 기억을 가진 한, 세상은 꽤 살만 하다. 내가 형편없는 사람일지라도 ‘내 편’으로 남을 사람을 가졌던 기억, 그것은 다른 아무것 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지금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금상첨화다).
딸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네 편으로 남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그다음 벌어지는 속 터지는 상황에서는 이런 마음 따위는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지만. 하, 오늘도 다짐에 다짐을 계속하는 나, 정말 걱정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