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 간 곳은 외곽의, 작은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대문 앞에 수령이 꽤 된 앵두나무가 있어서 때가 되면 붉은 열매를 늘어뜨렸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먹성 좋던 당시의 나는 그 나무를 보고 어떤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란 것이 별 것이랴, 씨를 심으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뭐 이런 것. 먹고 남은 배를 땅에 던진 것은 그와 같은 순간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배 두 개와 자두씨 한 알이 땅에 묻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버리는 것이 귀찮아서였던 것도 같다.
몇 년 후 그것들은 나무가 되었다. 가장 놀란 것은 부모님이었다. 자신들이 사다 심은 것이 아니니 씨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을 믿기는 했으나, 듣도 보도 못한 성장기를 쓰고 있는 과일나무를 바라보고 있자니 신기했던 거다. 자두나무는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해서 부친에게 잘리는 수모를 당했지만, 두 그루의 배나무는 나름대로 훌륭하게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다.
달밤의 배꽃이 얼마나 황홀한 지는 안 본 사람은 모른다. 덕분에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같은 시조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울 수 있었다. 과수원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법에 대해 완벽하게 무지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 태어난 배나무는 그저 생긴 대로 열매를 맺었다. 다섯 살 아이 주먹 만한 배가 열렸는데, 열매를 솎아주는 법도 몰라서 개수는 무지하게 많았다. 몹시 달지만 먹을 것은 없었던 배. 지금 생각하면 과실주 담그는데 탁월한 재료였을 것 같은데, 술은 근처도 못 가시는 부친에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 집 배나무의 효용은 열매보다는 꽃이었다. 배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가족들이 일없이 마당을 서성였다.
그런 나였으니 뭐든 잘 키웠을 것 같지만 어림없는 소리. 물을 주면 줬기 때문에, 안 주면 그 때문에 죽은 화분이 몇 개 생긴 이후로 아무것도 키우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작년 레몬 커드와 레몬청을 만드느라 열몇 개의 레몬을 하룻밤에 끝장 내던 날, 문득 배나무가 떠올랐다. 레몬씨는 다 발아하기만 한다면 농장을 만들 수도 있을 만큼 많았다. 실 해 보이는 두어 개를 빈 화분에 묻었다. ‘혹시나’하는 마음이었다.
그중 하나가 싹을 틔우고 초록색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더니 줄기를 올리고 잎을 내며 자라났다. 내 손으로 싹부터 낸 첫 화분이라 애지중지하는 마음도 있었고, 워낙 키우는 것보다는 죽이는 것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던 차라 전전긍긍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무리 작아도 나무인지라 바람에 흔들리며 키워야 줄기가 단단해진다는 소리를 듣고는 베란다 문이 열리는 위치로 화분 자리를 바꾸기도 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했다는 말이다.
원래 그런 것인지, 키우는 사람의 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나의 레몬 나무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자랐다. 50센티 정도 자랐는데 옆으로 뻗은 가지라고는 없이 오로지 위로만 향해갔다. 그렇다고 아주 굵고 튼실한 상태도 아니어서 이러다 제 키를 못 이기고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나보다 화분을 만 오천팔백 배쯤 잘 키우는 모친에게 상태를 설명하자 간단한 처방을 내려 주셨다.
“잘라.”
“응?”
“위를 잘라줘. 그래야 옆으로 퍼져.”
“아니, 위로만 큰다는 것은 생장점이 제일 윗부분에 있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막 자르면 어떻게 하냐고요. 괜히 나무 죽이는 거 아니야?”
모친은 무슨 13차원의 끈이론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 진정 방법은 하나 뿐이란 말인가.
그날 밤 비장한 마음으로 가위를 들고 레몬나무로 다가갔다. 산 타면서 나무 가지 부러뜨리는 일은 다반사였는데, 대상이 내 나무가 되고 보니 이리 마음이 심란했다.
결론적으로 모친의 말 대로 됐다. 잘린 곳에서 가지가 세 개나 뻗어 나왔다. 어찌나 빨리 가지를 내고 자리를 잡는지 커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마 나의 가위질이 녀석에게 생의 위협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내 마음을 알아줘. 흑
일반적으로 위기는 밖에서 온다. 스스로 그것을 만들고 헤쳐 나가는 법이란 없다. 위기는 의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알 수 없는 때에 뒤통수를 갈기며 찾아온다. 우리에게는 주저앉느냐, 극복하느냐 두 가지의 길 중 하나가 있을 뿐이다.
아킬레우스의 친구 와이프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지만 않았다면, 헨리 5세의 아버지가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나라를 남기고 죽지 않았다면 아킬레스도 헨리 5세도 주인공이 될 기회는 없었다. 그들은 느닷없이 닥친 위기를 자신의 방법으로 풀어나갔다.
많은 아이들이 겪는 고난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번 주 시험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수능은 아이들이 만든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아이들과 일단 멈추는 아이들이 생긴다. 슬픈 일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어른들도 꽤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춰보면 어른들의 걱정 같은 것은 다 부질없다. 결국 아이들 자신이 힘을 쏟아 해결할 수밖에 없다(아, 구조를 바꾸는 문제는 어른들 몫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어른들의 기우와 달리 몇 개의 가지를 더 힘차게 펼치고 굳건하게 자라날 것이다. 나의 레몬 나무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레몬이 주렁주렁 열리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싹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초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아, 살짝 레몬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궁금하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튼실한 상태로 살아남는 것이다.
-특별히 수능생에게 드리는 위로 : 수험생 여러분, 고생 많으셨어요. 부모님도 토닥토닥.
피에스.. 글에서 언급한 ‘헨리 5세’는 영화 '더 킹 헨리 5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실제 역사는 몰라요. 그런데 영화, 그 정도로 뻔해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티모시 살라메 때문에 본 것이긴 하지만, 너무 안일한 전개에 오히려 깜짝 놀랐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