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행복해졌을까?

-오늘의 위로

by 지안

여덟 살 혹은 아홉 살 즈음의 일이다. 우리 가족은 계량 한옥 문간방 두 개를 빌려 살고 있었다. 한 방에서는 부모님이 주무셨고, 나머지 방에서 오빠와 내가 생활했다. 초등학생 둘이 간신히 눕고 한 뼘 정도 남는 공간이었다. 가구라고는 천으로 만든 비키니 옷장과 좌식 밥상뿐. 그 상 위에서 식사를 하고, 숙제를 하고, 싸움도 했다.


상을 펴 놓고는 남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밤이 되면 밥상을 접어 벽에 기대 놓고 잠이 들었다. 한창 성장기의 아이들이었으니 누운 자리에서만 곱게 잘 수 없는 것은 인지상정! 어느 밤, 괴성과 함께 옆 방에서 주무시던 모친이 뛰어왔고, 겨우 뜬 내 눈에 피로 범벅이 된 오빠의 얼굴이 보였다. 자다가 상을 건드렸고, 그것은 하필 오빠 얼굴 위로 쓰러졌고, 그 결과 방바닥에 흥건하도록 코피가 나온 것이었다. 모친은 울면서 오빠를 업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아침에 퉁퉁 부은 코를 한 오빠와 학교에 갔다. 뭐 그런 시대였다. 죽지 않는 한 학교는 꼭 가야 하고, 선생에게 두들겨 맞고도 오히려 ‘네가 잘못했으니까 그렇지’라며 한 대 더 맞는 그런 시대 말이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터줏대감과 같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평상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골목으로 튀어나와 이리로 저리로 뛰어다니던 시대.



한 번은 낯선 소녀가 골목에 나타났다. 내 또래였는데 어스름이 되도록 어울려 잘 놀았다. 어차피 부모님은 밤늦게 오시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같이 놀던 친구들이 다들 저녁 먹으러 집에 갈 시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헤어져야 했는데 소녀는 집이 없다고 했다. 당연히 우리 집으로 데려와 함께 밥을 먹고, 겨우 남은 공간을 비비적거려 틈을 만들어 같이 누워 잠이 들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방 문을 연 모친의 심정을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동경 밝은 달에 밤 드리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런만 둘은 뉘 것인고”라고 읊조린 처용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다리가 네 개만 있어야 하는데 여섯 개가 있었으니. 그런데 뭐, 그게 그런 시대였단 말이다.



지난 시간이 완전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굵은 사건들은 매듭처럼, 작은 일들은 그 아래 걸린 줄처럼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상식도 변한다. 지금이라면 응급실에 다녀올 정도로 피 흘린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부모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아닐 뿐이다. 과거의 일을 현재에 비추어 다시 되새김질하는 것이 소용없는 이유다(지금은 아동학대 아닌가? ㅋ).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백과사전이 될 것”이라는 어르신을 꽤 많이 보았다. 내 입장에서 어르신이면 전쟁도 겪었고, 피난도 갔고, 새마을 운동도 하신 분들이다. 백과사전이 왜 안 나오겠는가. 하지만 마음속으로 온전히 ‘아, 당신의 인생만 힘들었겠어요’라고 생각하느냐면 그건 또 그렇지가 않다. 나도 내 나름으로는 아등바등 살아왔고, 지금도 매일이 과로의 연속이고, 앞날 또한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상처는 어떤 형태로든 모두에게 있고 아픔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누가 더하고 덜하고 잴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객관화하지 않으면 안으로 파고들어 더 깊숙한 내상을 입힌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오빠가 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있었으니, 20년을 함께 한 셈이다. 한참 동안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끝을 맺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빠는 친구들을 만날 때도 종종 나를 데리고 나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술도 마시고 당구도 치고 밥도 먹고 카페도 갔다. 오빠가 죽은 후, 그 인연들은 그대로 이어졌는데, 결혼식 신랑 측에 앉아 펑펑 운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칠 노릇이다. 그런데도 아무 소리 안 한 오빠 친구 및 배우자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오빠 이야기를 하면서 울지 않게 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처음에는 하지 않으려 했고, 조금 지나서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상처는 계속 스며들어왔고, 이 세상에 나보다 큰 상처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당연한 결론만 남았다. 타노스에 의해 인구의 절반이 날아간 어벤저스의 지구가 딱 이랬을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도 오빠가 간 길을 따라가는 것 외에 방법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입 밖으로 조금씩 말을 꺼냈다. 오빠 친구들과 술을 먹다가 꺼냈을 때도 있었고, 멀쩡하게 환한 밥집에서 밥 먹다 말고 울어 젖힌 적도 많다. 인간성 좋은 오빠 친구들이 한 번의 타박도 없이 버텨준 덕분에 문장이 이야기가 되고, 드디어 울지 않고 그때를 말할 수 있는 시간까지 올 수 있었다.


지금은 감정 없이 그 일을 떠올릴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어스름 노을을 볼 때, 예전에 함께 듣던 음악이 라디오에서 튀어나올 때, 오빠가 좋아하던 소설가의 책이 출판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때뿐이고, 더 이상 내 상처만이 우주 최대 극강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혹은 말할 수 있는 아픔이 있고, 그것들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전 소녀와 함께 잠든 밤, 놀란 모친은 우리를 깨워 자초지종을 묻고(그래 봐야 뭐 할 말이 있었겠는가. 얘가 집이 없대요. 뭐 이 정도 아니었겠는가.) 별말 없이 소녀를 데리고 나갔다. 어쩐지 혼이 날 것 같은 예감에 오빠와 나는 자는 척 숨을 죽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모친은 그 아이가 큰길 건너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모르는 아이를 집에 들이면 안 된다는 다짐을 받는 선에서 일이 마무리되었다. 예감과 달리 야단을 맞지 않는 것이 확실해진 오빠와 나는 즐겁게 등교 준비를 했다. 뒤에서 부친과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소녀는 엄마가 재혼하면서 살게 된 새아버지 집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는데도 찾을 생각조차 안 하고 있더라며.


이혼, 재혼이라는 것이 생소했던 때여서 모친의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 아이가 그 집에서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모친의 걱정은 내 알바가 아니었지만. 가끔 그 소녀를 생각한다. 그 아이는 잘 자랐을까? 지금은 행복해졌을까?


- 오늘의 위로 : 당신의 상처는 언젠가는 아물 겁니다. 흔적은 남아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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