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선, 나를 사람 취급해 줬다.

사랑도 책임도 가져본 적 없다는 깨달음은, 나를 천천히 지워갔다

by 이지아

사랑도 책임도 가진 적이 없었는

그 깨달음은 나를 쓰러뜨리지 않았다.


그저, 나를 천천히 사라지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지워지고 있었다.


# 거울 앞의 여자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그 속의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볼품없는 얼굴, 생기 없는 눈, 터진 입술.

그 얼굴이 나인지, 엄마인지, 나는 모르겠다.

이제는 말도, 표정도, 사라졌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흔적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안다.
내가 어디서부터 무너졌는지.


몇살이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때였다.


처마 밑에 고드름이 대롱대롱 달리는 추운 겨울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서성이는 내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맛있어 보이는 콩 조림을 보고는 한입 먹어보려 손을 뻗었다.

엄마는 내 손등을 찰싹 때리더니,

나를 성가신 물건을 치워내듯 밀어냈다.

" 얘, 오빠 반찬인데 먼저 먹으면 어쩌니?"


맞은 손등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너무 놀란 탓인지 내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운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먼저 먹지 않았다.
먼저 말하지도, 먼저 웃지도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잊었겠지.
나는 못 잊는다.
시작은, 항상 그 여자였다.


거울 속의 여자.
화장기 없는 낯빛, 잃어버린 표정.
날 닮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였다.


밥솥이 비어 있는 걸 보면서도, 장은 보지 않았다.
시장 가는 길에 누굴 마주칠까 봐,
그게 귀찮았다.


라면조차도 끓이지 않았다.
먹고 싶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그냥 방바닥에 누워있었다.

창밖엔 비도, 해도 없었다.

창틀에 쌓인 먼지 위로 바람이 스쳤다.


피익-


그 소리를 몇 시간째 듣고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나서야
어제 땄던 돈이 떠올랐다.
만 원.

도박장 냄새가 아직 손끝에 붙어 있었다.

재떨이는 넘쳤고,
컵엔 어제 마시다 남은 술이 반쯤 남아 있었다.


창문은 흐릿했고, 나는 더 흐릿했다.


지금이 무슨 요일인지,
해가 졌는지도 잘 모르겠었다.

담배를 다시 물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입에 문 채 살아 있다는 감각,

그게 전부였다.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도 속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

고요한 적막을 깨고

시끄러운 전화벨이 울렸다.


딸아이가 건 전화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더 받을 수 없었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포함되지 않는 존재.


나는 점점, 사람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다 망가졌고, 다 없어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딱 하나밖에 없다.


이대로 끝까지 망가지는 일.


『도라지꽃』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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