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키운 딸하나, 살림밑천(2)

엄마는 사람 같지 않았다.

by 이지아

엄마가 내려왔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 예고도 없이.


냉장고 문을 여는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번에도 그냥 ‘왔던’ 게 아니라,

‘무언가를 가져갈’ 거라는 걸.




엄마는 떠나기 전날,

냉장고에 반찬통 몇 개를 정리하며 말했다.


“ 은행은 가까운 데 있어?
내가 계좌번호 적어줄게.”


“딸 키워 이렇게 든든한 날이 오네.
명순아, 너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그 말이 꼭
다 쓴 카드영수증처럼 들렸다.
갚아야 할 대금은 생각도 못한 채,

무작정 긁어대는 카드처럼.


엄마를 배웅한 뒤, 집에 돌아온 나는

다시, 주방으로 갔다.


찬장 맨 위에 꽂아둔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잔을 꺼내지도 않고 컵에 소주를 따랐다.
안주도 없이, 말도 없이.
단 한 모금이 목을 넘어갈 때마다
내가 나를 삼키는 것 같았다.




엄마가 집에 다녀가고 얼마 뒤,

인천 도련님댁 조카 돌잔치가 있어 다녀오는 길이었다.

부산에서 인천까지 거리가 만만찮았지만,

우리는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비행기에서 내려 도착한 잔칫집엔

기름 냄새가 폴폴 풍기고 있었다.


잔칫집답게 음식은 푸짐했고,

사람들의 정겨운 말소리는 음식보다도 더 넘쳐흘렀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남편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남편은 동생들에게 각별했다.

특히, 인천의 사는 셋째 도련님 일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었다.


셋째는 남편을 잘 따르기도 했지만

몸이 약하고 심성도 여려

인천 어디 공장에서 고생고생만 하다가 병을 좀 얻었더랬다.


그런 동생이 이제야 겨우

가정을 꾸리고 방 한 칸 얻어 사는 것만으로도

켜져 있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카가 돌잔치까지 하니,

술도 못 먹는 양반이 흥에 취한 건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라,

무던히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 저녁은 처가에 하루 자고 내려가자."


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엄마 집.


집 앞에 도착하니

불이 환하게


그 불빛이 우리는 반기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놓였다.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된장찌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엄마?"


"어이구, 왔냐?"


엄마는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서 있었다.

뭐가 그리 분주한 지 음식 하기에 바빴다.


상위에 놓인 차림을 보니,

미나리무침이며, 도라지나물, 참나물.

죄다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

거기에 애들이 좋아하는 불고기까지, 잔칫집이 따로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밥상이었지만,

남편과 애들을 챙겨주는 엄마의 모습에

괜스레 어깨가 들썩거리며 기분이 좋아졌다.


최신형 냉장고를 보기 전까지는....


부엌에는 하얗고 매끈한 신형 냉장고였다.

낡고 덜컥거리던 예전 그건 어디로 갔지?
순간 헷갈렸지만, 눈을 돌리자 더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다.

밥솥, 가스레인지 살림이 전부 새 거로 바뀌어있었다.
TV도, 전보다 더 커졌고 화면이 너무 선명했다.


안방문을 여니 새로 맞춘 장롱이 떡 하니 놓여있었다.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새로 산 밥솥으로 한 밥이라 밥맛이 참 좋더라. 요즘은 기계들이 참 좋아."


말끝에 웃음까지 덧붙였다.
사람 좋은, 오래된 웃음.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숨은 무엇이 내 속을 서늘하게 했다.


잠시 후, 거실 한쪽에 앉아
나는 가만히 주변을 훑었다.
익숙해야 할 집이 어딘가 호텔방처럼 낯설었다.


집안살림이 죄다 새 걸로 바뀌어 있는 풍경.

장롱, 냉장고, TV, 밥솥, 가스레인지
하나같이 내가 준 돈으로 바뀌었을 거라는 생각이
설명도 없이 마음에 박혔다.


그날 밤,

남편은 금세 잠들었고

나는 소리 없이 천장을 오래 바라봤다.

소주 한잔만 딱. 먹으면 잠이 들 것만 같은 불면의 밤이었다.


# 엄마는 사람 같지 않았다


돈을 보내고 나서 며칠간, 나는 손가락 끝이 얼얼했다.
은행 이체를 하며 비밀번호를 눌렀던 그 손가락.


" 해준 게 뭐 있다고 뺏어가기만 하냐고."


나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소리 내서. 그러자 숨이 차올랐다.


엄마가 사람 같지 않았다.
무섭고, 두렵고, 싫고, 밉고,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나를 잠식했다.
그런데 나는 또... 전화를 걸었다.

이 모순된 행동의 이유를 나조차 알 수 없었다.


" 요즘엔 어때? "


내가 먼저 물었다.
남편이 어떻게 하는지, 애들은 뭐 하는지,
쓸데없는 말들을 참 길게도 많이 했다.


" 너 남편 참 잘 만났다."

엄마는 꼭, 그 말만은 빼먹지 않았다.


무언가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안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뭔가가 금 가기 시작했다.
말 못 할 구멍이 생기고 있었고,
나는 그걸,

아직 나조차 모른 척하고 있었다.


엄마가 필요했는지,

엄마라는 말이 필요했는지,

나도 헷갈렸다.


# 엄마와 나, 기묘한 대화


엄마는 늘 돈을 받은 뒤에야
내 얘기를 조금 들어줬다.
나는 그게 고마워서 또 말했다.

외로운 일상, 술 한 잔 기울이며 속삭이듯 건넨 말들.

엄마는 “그만 마셔라, 몸 축낸다”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렇게 한 밤이 지나면, 다시 통장은 비어있었다.
나는 더 많이 외로웠다.


이 관계는 뭘까?


엄마는 돈이 필요했고, 나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도라지꽃 #명순이 #외로움 #차별 #착취 #엄마라는 이름의 폭력





『도라지꽃』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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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는 늘 그득한 통장 같은 '명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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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인 줄 알았던 죄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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