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나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피해자 연대

by 김지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은 치유될 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실비아 플라스는 그의 자전적 소설에서 어머니가 아무런 예고 없이 동생을 집에 데려온 그날 느꼈던 기분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세상은 온통 따뜻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데 나만 소외된 기분, 마치 떨어져 나온 퍼즐 조각처럼 차갑게 버려진 기분 나는 정지해 버렸는데 세상은 나와 아주 상관없이 잘 돌아갈 때 느끼는 상실감과 배신감. 최초에 느꼈던 이 끔찍한 감각은 이후에도 너무나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에 유령처럼 불쑥 나타나 언제까지나 영원히 똑같은 느낌으로 계속해서 반복된다. 행복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유배된 듯한 이 감각은 감옥 창문 너머로 경험하는 봄의 햇살만큼이나 잔인하여 햇볕이 따뜻하면 따뜻할수록 내가 유배되어 있다는 사실만 더 크게 다가오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서 이 힘든 생애가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학대당한 경험은 내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망각시킨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정신과 육체가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함부로 다루어질 때 나는 거대한 잼 항아리 속에 갇힌 파리가 된 기분이다. 잼은 밀도가 높고 미끄럽다. 발버둥 칠수록 계속 아래로 가라앉는다. 숨쉬기가 어렵고 영원히 위로 올라가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학대당한 순간 나는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차단된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과의 연결 회로가 전부 끊어진다. 절대고독. 영혼은 조각조각 잘게 토막이 나서 아무 쓸모도 없는 상태로 버려진다.


여성운동가이자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어린 시절 대가족이 함께 살던 드넓은 저택의 어두운 구석에서 의붓오빠들에게 성폭행당한 경험을 그의 저서를 빌려 이야기한다. 다시 떠올리기도 끔찍한 학대의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어가면서 집요할 정도로 상세하고 길게 묘사한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자신이 느꼈던 느낌의 실체와 경험의 의미를 스스로 정리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아주 오래전 선배 작가들이 남긴 글을 통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분들은 또 그 윗대의 누군가의 용기에 빚지고 있다. 성적인 학대는 인류의 시작부터 대대로 이어지며 여성들이 겪어 왔던 공통의 경험이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여성은 그가 최초가 아니며 최후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경험으로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것처럼 서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학대 경험의 가장 좋지 않은 점 중 하나인 철저한 고립감은 개별적 고통을 서술한 공통된 경험의 연대로 위로받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용기 있는 고백을 통해 나도 나에게 정확하게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지를 이해한다. 정체를 알 수 없이 막연하고 소름 끼치는 덩어리로만 내면에 존재하던 그것들은 마침내 실체를 형성한다. 내가 느꼈던 감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다. 내가 학대를 당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며 물건으로 다뤄진 경험을 했다고 해서 내가 물건이 되지는 않는다. 경험이 나 자신인 것은 아니다. 경험을 자기 방식대로 잘 정리하면 그 경험을 자신과 분리할 수 있다. 경험은 항아리 속에 남고 경험과 분리된 나는 다시 인간의 상태로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나의 경계를 침해하고 괴롭히던 수많은 경험은 아직도 밤마다 나의 꿈속에 찾아온다. 그것들은 몽땅 하나로 합쳐져 어린 시절 내 팬티 속에 손가락을 쑤셔 넣던 그 험상궂은 아저씨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남자는 내 집에 들어오려 한다. 나는 문을 걸어 잠그려 노력하지만, 문고리는 너무 약하고 문을 잠그는 동안 창문이 열려버린다. 창문을 닫으려 하면 다시 문이 열린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남자를 막을 수는 없다. 그는 오래전에 이미 내 집에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한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바꾸려고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조각나고 버려진 나의 영혼은 바람이 몹시 부는 황량한 들판 위에 쓸모없이 나뒹굴고 있다. 나는 먼지가 쌓인 시쳇더미를 품에 안아서 집으로 데리고 온다. 깨끗하게 씻기고 고생물학자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팔다리와 머리 몸통을 맞춰본다. 튼튼한 바늘과 억센 실을 이용하여 차근차근 정성 들여 바느질한다. 백조가 된 오빠들이 인간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막내 공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