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피터 팬> -
모든 아이는 그렇게 처음으로 불공평한 대접을 받을 때 상처를 입는다. 아이가 누구에게 당연히 기대하는 권리는 공평함 뿐이다. 그런 아이를 불공평하게 다룰 때 아이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이전과 똑같은 아이가 될 수 없다. 그 누구도 처음 경험한 억울함, 불공평함을 잊지 못한다.
- 피터 팬(비룡소 2004) P167-168
한 여인이 시름에 잠겨있다. 아들을 사고로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아홉 명이나 있었지만 그 아이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을 보고 기쁘게 웃는다. 막내아들이 죽은 형의 옷을 입고 어머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형의 옷을 뒤집어쓰고 형을 대신해서 살기로 결심한 순간 아이는 자라기를 멈추었다. 현실 세상에서 지워져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 이 가여운 어린이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하고 환상세계에서 살아간다. 이 아이가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베리이다. 마음을 따라 몸도 자라지 못했던 제임스는 체구조차 무척 왜소했다고 한다.
어른의 세계로 편입하지 못한 대신 제임스는 마음속 상상의 세계를 다채롭고 아름답게 가꾼다. 절친한 친구였던 데이비스 부부의 다섯 아이를 통해 그 세계는 더욱더 풍성하고 흥미진진하게 확장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 <피터 팬>으로 결실을 본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 팬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온갖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으로 가득한 환상세계, 네버랜드. 하지만 그곳에는 딱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엄마’였다.
이토록 멋진 세상의 주인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던 피터 팬은 네버랜드의 버림받은 소년들을 돌봐줄 엄마의 존재를 간절히 원한다. 그렇게 엄마를 원하던 피터는 달링 부부의 큰딸인 웬디라는 소녀를 만나 그녀를 자신의 세계로 데리고 온다.
네버랜드에는 해적, 인디언, 소년, 요정, 인어들이 산다. 그들은 서로 쫓고 쫓기는 관계지만 각자 사는 곳이 나뉘어 있고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어울려 지낸다. 그들은 ‘엄마’가 없다는 동질감이 있는데 사실 모두 버림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디가 네버랜드에 들어와 소년들의 엄마가 되면서 이 절묘한 균형이 깨진다. 소년들에게 엄마가 생기자, 해적들은 아이들과 더 이상 놀 수 없게 되어 실망한다.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절차와 예의를 무시한 해적들의 대학살은 바로 이 소외감과 질투에서 비롯된다. 전투의 궁극 목적은 소년들에게서 엄마를 빼앗는 것이며 할 수 있다면 웬디를 자기들의 엄마로 삼는 것이다.
네버랜드에서 일어난 ‘엄마 쟁탈전’은 네버랜드의 모든 이에게 어마어마한 희생과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이 사건을 통해 네버랜드와 엄마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쓸쓸한 결론에 도달한다. 웬디와 소년들은 진짜 엄마를 찾아 집으로 돌아온다. 네버랜드의 모든 소년은 달링 부부에게 입양되어 온전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 얼싸안고 기뻐한다.
달링 부부의 아이들은 존과 마이클까지 합하여 모두 8명인데 이는 형이 죽고 난 뒤 제임스 베리의 형제들 숫자와 같다. 피터는 웬디네로 입양되기를 거부하고 창밖에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하는데 사실 그 자리는 그의 죽은 형의 자리고 원래대로라면 8명의 형제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제임스이다. 제임스 베리의 성장 과정은 소설 속에서 피터 팬을 통해 그대로 재현된다.
이보다 더 행복한 광경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본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 창문으로 방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이상한 소년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결코 알 수 없는 무수한 즐거움을 수없이 맛본 그였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그에게는 영원히 금지된 유일한 기쁨을 창문 너머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P293
그는 결코 자신에게 진짜 엄마를 허락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그를 바라봐 주고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에게 행복을 허락할 수 없다.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자기 자리에 형을 대신 들여앉히고 스스로 가족 밖으로 물러난 어린 제임스의 끔찍한 아픔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피터 팬은 엄마를 그리워하면서도 자기를 버린 엄마에 대한 증오심을 갖고 있다. 피터는 웬디를 엄마로 삼으면서 그녀가 가짜라는 것에 안심한다. 진짜 엄마를 가질 수 없었던 피터는 자기가 진짜 엄마를 가질 자격이 있는 존재인지 의심스러웠다. 이러한 태도는 피터가 아빠 역할을 할 때도 나타난다. 피터는 아이들의 아빠가 된 것이 무척 기쁘면서도 웬디에게 거듭해서 묻는다. ‘이게 진짜 현실은 아니지?’라고. 오랫동안 어린아이로만 살아왔기에 어른이 되는 것이 무서웠을 수도 있고 진짜로 어른이 되는 순간 그나마 지푸라기처럼 잡고 있던, 엄마의 사랑을 얻을 기회를 빼앗길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형제 틈바구니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늘 그리웠고, 어머니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제임스의 쓸쓸한 마음은 네버랜드의 소년 중 가장 수줍어하는 투틀즈의 대사를 통해 나타난다.
“내가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면, 그럼 마술 한번 해 볼까?”
하지만 이런 시도는 소년들에게 곧바로 외면당한다.
“내가 꼭 무엇이 되려는 것은 아니었어." P185
피터는 살뜰하게 사랑해 주지도 않았으면서 어른이 되라고 종용하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더 이상 자라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엄마가 필요하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피터는 엄마가 있었다고 해도 이제는 엄마가 그립지 않았다. 엄마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었다. 엄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쁜 기억만 날 뿐이었다.
“아니, 안 간다니까.”
피터는 웬디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 엄마는 나보고 자라야 한다고 말할 거야. 나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작은 아이로 재미있게 놀며 살고 싶어.” P209
하지만 엄마 따위는 필요 없다고 외치면서도 여자들을 만날 때마다 이성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피터의 이런 요구에 지친 여자들의 푸념은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피터는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타이거 릴리도 마찬가지고. 타이거 릴리는 내게 누군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모양이야. 하지만 내 엄마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래. “ P190
제임스는 결혼하고도 진짜 어른도 진짜 아빠도 되지 못했다. 피터 팬이 그랬던 것처럼 아내에게 엄마 역할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베리 부인의 애처로운 처지는 피터 팬 이야기 속 ‘환상의 새’를 통해 나타난다. 새 둥지가 바다에 빠졌는데도 알 품기를 멈추지 않는, ‘모성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환상의 새는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바다에서, 바닷물이 바위 위까지 차올라 죽을 뻔했던 피터 팬의 목숨을 구한다. 수줍고 소심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제임스 베리의 지독하게 외로운 삶에 그의 아내가 한줄기 구원의 빛이 되어준 것은 맞는 것 같다. 둥지를 보내준 환상의 새를 보고 피터 팬은 이렇게 생각한다.
어미 새는 피터를 구하기 위해 둥지를 열심히 피터 쪽으로 밀고 있는 것이었다. 둥지 속에 자기 알이 들어있는데도 말이다. 이 새의 행동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피터는 어미 새에게 잘 해준 적도 있었지만, 괴롭힌 적도 많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구해주려고 하는 것은 달링 부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처럼 피터의 젖니에 반해서 마음이 녹았기 때문인 듯하다. P175
하지만 제임스 베리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피터 팬과 환상의 새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먹는 대화 장면을 통해 현실적인 부인과 상상 속에서 살아가는 제임스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무척 힘들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결국 두 사람은 15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이혼한다.
새와 피터는 격려의 인사를 서로 나누며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P178
환상의 새는 본래의 둥지를 버리고 새로운 모자로 둥지를 옮겨서 계속 알을 품는다. 하지만 환상의 새는 한 번도 알을 부화시키지 못한다. 제임스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아이가 있었다면 이 부부의 생활은 행복했을까?
엄마가 되어주길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아내를 떠나보낸 뒤 제임스 베리는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산다.
데이비스 부인을 통해 따뜻하고 상냥한 모성을 경험한 제임스 베리는 아마도 조금쯤은 상처받은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피터 팬의 태도 변화로 알 수 있다. 여전히 엄마에 대한 갈망은 가지고 있지만 웬디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욕구가 충족된 피터는 이제 아주 가끔만 엄마가 필요할 뿐이다. 봄 청소 기간에만 웬디를 데려가라는 달링 부인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웬디를 다시 찾아오는 기간이 점점 길어진다.
웬디가 자라면서 그녀의 딸로, 손녀로 대물림되는 가짜 엄마의 자리는 태생적으로 영원히 피터의 진짜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가짜 엄마는 가짜라서 안심되기도 하지만 진짜가 아니어서 완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가짜는 역시 가짜일 뿐이니까.
제임스 베리는 데이비스 부부가 모두 죽고 난 뒤 그들의 다섯 아이를 입양해서 키운다. 피터 팬이 달링 부부에게 입양되지는 못했지만, 웬디네를 언제든지 내키는 대로 드나들 권리를 얻었듯이 제임스는 비록 엄마는 얻지 못했지만, 아이들의 아빠가 되면서 진짜 자기 가족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저 친절한 엄마 같은 사람이 필요할 뿐이야.” P131
제임스 베리는 평생 그토록 갈망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아름다운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그것은 성장과 맞바꾼 지독한 선물이었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