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는 날
제가 깜짝 놀라실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순간, 분주하게 뒤돌아서 밥을 푸고, 반찬을 꺼내며 식사를 준비하시던 두 분 발아래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일 년에 한 번 뵙는 점잖은 분들께 장난이 심했구나, 후회했다. 나중에 동생에게 들으니, 아버님은 내가 승진을 한 줄 아셨다고 했다. (아, 아쉽게도 아직은 아닙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소식을 꼭 전해드려야겠다.)
지난주에 결혼식에 갔는데요, 거기서 만난 사모님이 아버님을 아시더라고요, 아버님뿐만이 아니라 식구를 전부 다 알던데요? 어떻게 아느냐고요? 여기 이사 오시기 전에 사시던 아파트 있죠? 거기 3층 사신대요. 아버님이 매일 아침마다 화단을 가꾸시고 꽃 화분을 가끔 선물하셔서 이사 나오시고 굉장히 섭섭하셨대요.
그제야 어머님이 아아, 그분! 키 크으시고,, 사모님은 키 크으시고, 덩치가 크신데, 사장님은 사모님보다 작고 배가 볼록하셨는데! 하신다. 아버님이 받아서 아아, 그 집 사장님이 서울대 나오셔서 일하시다가 퇴직하셨다던데, 사모님은 교장선생님이랬지 아마, 하신다. 어머, 세상 참 좁네. 네, 제가 친구랑 둘이 그랬어요. "착하게 살아야겠다." 고요.
어머, 그 집 사장님 매번 들랄날락하며 담배를 어찌나 피우시는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필걸. 사모님은 꼭 다섯 시 삼십 분 되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와. 용준이 엄마가 보고서 저 사람은 뭘 하길래 이 시간이면 퇴근하냐고 그래서 내가 말해줬지, 교장선생님! 주차장에 전용 자리가 있어, 그 시간에 들어오는 차가 없잖아.
아버님이 받으신다. 아, 사장님이 그 집 사모님한테 깍듯하시지. 사모님이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데 나가실 때 절을 하시지. 이번엔 어머님 차례다. 그러엄, 마트에서 장 볼 때도 옆에 딱 붙어 서서 보좌하고 카트 끌고 그런다구. 아버님. 그 집이 우리 뒤에 들어왔나? 그 집 들어온 지 삼 년쯤 됐을껄? 어머님. 그러면 그 집도 그 동네에 연고가 없네. 우리가 먼저 들어와 살고 있었으니까. 기댈 데가 없었네. 그나마 우리랑 저기가 있었네.
참, 그건 그렇고, 어머님 김장하시느라 힘드셨겠어요. 매번 이렇게 힘들게 하신 걸 받아먹기만 해서 죄송해서 어떡해요. 아버님이랑 제부도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아버님이다. 저는 그냥 옆에 있다가 뭐 갖다달래믄 주고, 나오는 통이나 씻고 하는거죠, 이제 얘랑 안사람이 둘이서 하는데, 사실상 둘은 도가 텄죠. 제부가 받는다. 저는 이제 김장 알바 뛰어도 될 것같아요. 어머님. 나는 총괄이지뭐, 아휴, 무슨요, 우리가 나눠먹을 데가 없잖아. 이렇게 일 년에 한 번씩 와주니 우리가 고맙지. 그나저나 올 아침에 베란다 하수구가 막혀서 김장날 아침부터 난리를 쳤잖아. 아주 굿이 한 바가지야. 글쎄. 한 달 전부터 그양 아주 김장때매 바뻤는데, 이제 나도 쉬어야지.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제부의 말을 들어본 즉슨, 두 양반이 하수구가 역류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신 걸 자신이 해결했단다. 제부는 손매가 야무지다.)
어떻게 지난 번에 편찮으시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매해 김장을 안 놓고 하세요. 진짜 대단하셔요. 아, 내가 안 하면 옆에서들 난리를 치니까. 얘, 새우젓 샀니? 새우젓을 지금 사놔야지. 얘, 뭐는 해놨니? 이렇게들 해대니 안 할 수가 있어요? 네? 누가요? 제가 언니들이 많아요. 언니가 셋이거든요. 옆에 있던 제부가 말한다. 엄마, 언니 넷 아니야? 어머님. 하나는 죽었잖아. '죽었다'는 그 말씀이 너무 태연해서 우리는 소리 죽여 웃는다. 호기심 아닌 호기심이 동한다. 어머님의 죽은 언니의 안부를 묻는다. 아, 언제 그렇게 되셨어요? 제부. 얼마 안 됐지 않아? 엄마. 왜, 그래도 꽤 됐지. 오 년 됐나.
오 년... 오 년이면 산 언니만 세고, 죽은 언니는 빼기에 충분히 시간인걸까. 어쩌다가요? 오 년 전이면 연세가 얼마 안 되셨을 텐데. 아니에요. 나이 많지. 내가 막내고 큰 언니랑 터울이 크니까. 교통사고였어요. 목욕탕 가려다 길 건너는데 차가 와서 치고 갔지. 그분이 큰 언니셨어요? 교통사고였군요. 응. 뺑소니, 즉사했지. 더 살아도 되는데. 그 언니가 나를 항상 그렇게 불렀어. 막냉아, 막냉아. 그 언니가 젤 큰 언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나를 그렇게 불렀어. 막냉아. 그랬지.
이야기를 하는데, 누가 와서 툭툭 친다. 김장 김치를 얹어 먹으라고 보쌈을 해주시는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미카가 식탁 아래로 들어와 하나 얻어먹을 걸 기다리다 지쳐 건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순한 애가 있어요? 그래도 얘 산책은 또 매일 꼬박꼬박 시켜줘야겠죠? 강아지 키우는 사람들 보니 그것도 큰 일이더라고요. 내 동생. 언니, 걔는 델고 나가며 안 걸어. 그래서 안고 다니다가 팔이 저려서 이제 산책은 포기했어. 엄마. 저는 고양이도 싫고 강아지도 싫고 동물이 다 싫어요. 털 날리고 냄새나고. 근데 어느 날엔가 얘가(제부는 혼자 자라서 동물을 키우고 싶어 한다) 강아지를 이미 사버렸다고 데려온다지 뭐예요. 키우는 건 이제 어쩔 수 없고, 내심 기대를 했지. 왜 요즘에 예쁜 애들 있잖아요, 아니, 근데 데려왔는데 세상에 하다 하다 이런 똥개를 어느 산골짜기에서 데려온 거예요. 근데, 왜 안 걸어요? 강아지들은 밖에 나가면 환장해서 좋아하잖아요. 몸이 무거운가?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언니, 겁이 나서 그래. 얘 밖에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랑 소음이랑 무서워서 한 걸음도 못 떼. 사시나무 떨듯 제자리에서 벌벌 떨고만 있어. 이번엔 아버님이 참전한다. 아, 걔가(그러니까 개가) 아픔이 있는 애예요. 산에서 막 태어나서 클 때 주인이 묶어놓고 때리고 굶기고, 학대를 받았다나 봐요. 그걸 우리가 데려온 거지. 처음엔 우리한테도 마음을 안 열더라구. 차츰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눈도 마주치고 옆에 오기도 하고 그러더니 이제 내가 뭘 먹고 있으면 옆에 와서 지 앞발로 나를 툭툭 건드려. 자기도 달라고. 그래서 산책도 우리가 자꾸 데려나가서 익숙하게 해줘야 하는데 못해주고 있는 거지.
우리 식구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줄 김치 포장은 끝나 있었다. 김치 잘 안 먹는 사람들이 먹기엔 많은 김장김치 세 통에, 이미 익은 알타리 무 한 통. 어머님은 그 사이에도 맛없으면 어쩌지, 식탁에 반찬이 김치뿐이네. 혹시 먹다가 부족하면 또 가져가서 먹으라는 등 챙기는 말씀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겨우 이 년 전에 암수술을 하셨는데 다행히 경과가 좋아서 육 개월마다 하는 검진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하며 좋아하신다. 내가 오늘 받은 통 안에 든 것은 김치가 아니라, 이야기보따리, 이 김치가 있기까지 당신의 이야기와 노고와 우리는 몰랐던, 당신의 보이지 않는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