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는 한권의 책을 쓰기 위해 태어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
에곤 쉴레의 표지그림이 주는 묘한 음습함의 작품.
이 소설은 따로 발행된 3권의 글을 하나로 엮었다. 그래서 같은 인물이 다음 편에서는 이름은 같으나 다른 인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은 쌍둥이 루카스 클라우스의 인생을 조망하는 내용이다.
헝가리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옛 영토의 72%, 인구의 60% 이상, 경제력의 80% 이상을 상실했다. 연이은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이탈리아 측에 가입해 전쟁이 끝난 뒤 또다시 많은 영토를 잃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 쇠락의 시기에 태어났다. 1956년 헝가리에서 발생한 혁명을 빌미로 소련군이 개입했다. 수 만의 사상자와 망명자가 생겼고 이 전쟁과 혁명을 경험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를 떠나 스위스에 정착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소설엔 그녀가 경험한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즉 무의미한 죽음이 반복되고 인간성이 상실되며 단지 생존만이 목적이 되는 그 시대상을 이해해야 한다. 기존의 가치로운 것은 더 이상 의미를 잃고 살아남기 그 한 가지에 몰입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제 1부 비밀 노트
전쟁 중 어머니에 의해 작은 국경도시 할머니께 맡겨진 쌍둥이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 인정 없는 할머니에게 종일 막일을 강요당한다. 둘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치열한 시간들과 맞닥들여지고 세상에 혹독히 단련되면서 함께 커간다.
글을 익히게 된 이후부터는 둘은 글을 쓴다. 그 내용은 나중에 미스터리처럼 펼쳐진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못된 짓을 서슴없이 하지만 그와 동시에 힘든 사람들을 돕는 이중적 모습을 보인다. 도덕이나 상식, 가치 등은 생존이라는 태산 같은 명제 앞에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쌍둥이의 하루하루는 치열한 살아내기였다.
그러던 중 전선에서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찾아오고 쌍둥이와 함께 국경을 함께 넘던 아버지는 지뢰에 목숨을 잃는다. 쌍둥이 중 클라우스는 그 시체를 밟고 국경을 넘고 루카스는 할머니 집으로 되돌아오는 걸로 1부는 마무리된다.
2부 타인의 증거
할머니 집으로 되돌아온 루카스는 홀로 삶을 꾸린다.
복잡한 가정사 속에서 아이를 출산한 야스민을 집에 들이고 그의 아들 마티아스를 친아이처럼 키운다. 그러면서도 도서관 사서이자 어머니 나이뻘인 클라라와 연인이 된다. 그녀는 전쟁 중에 행방불명된 남편을 그리워한다. 루카스와 건조한 연인관계를 유지하지만 후일 남편을 찾아 떠나버린다.
마티아스는 장애가 있는 영민하고 예민한 아이이다. 그는 루카스가 하는 대로 자기도 글을 쓰며 루카스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러던 중 작은 사건이 시발이 되어 어린 마티아스는 자신의 글을 불태우고 루카스 집 다락방에서 자살을 한다.
이 책에선 글을 쓰는 사람이 네 명 나오는데 루카스, 클라우스, 마티아스, 그리고 서점 주인인 빅토르이다.
빅토르의 이야기. 책 속의 또 다른 이야기이다.
서점 주인인 빅토르는 자신의 오래된 갈증인 글쓰기를 위해 서점을 루카스에게 팔고 누나인 소피와 함께 산다.
그러나 생각만큼 글은 써지지 않고 매일매일 지쳐간다. 그를 향한 소피의 힐난은 계속되고 급기야 빅토르는 그녀의 목을 조른다.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지.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힐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2부의 말미엔 국경을 넘어간 또 다른 쌍둥이인 클라우스가 국경마을로 돌아오면서 대반전을 예고한다.
3부 50년간의 고독
3부는 대반전이다. 독자들의 혼란은 극에 달한다.
정말 쌍둥이가 존재한 것인지, 실재하는 건 누군지, 쌍둥이가 어릴 때부터 써왔던 글은 도대체 누구의 글인지.
어렸을 때 살았던 소도시로 온 클라우스. 기억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사고로 재활원에 있었고 전쟁 중 포격으로 재활원이 폐쇄된 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소도시의 할머니에게 위탁된다. 극심한 외로움 속에서 클라우스는 자신과 같은 쌍둥이 형제를 꿈꾸며 그와 함께 살아가는 매일매일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국경을 넘는 사람을 안내하게 되고 지뢰로 죽은 그의 시체를 밟고 국경을 넘는다.
50세가 되어 다시 돌아온 소도시에서 그는 루카스 클라우스라는 필명의 시인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가 자기가 찾던 쌍둥이 형제 루카스임을 알게 된다. 클라우스는 그와의 조우 후 대사관으로 돌아가던 중 기차에 몸을 던져 50년간의 고독을 끝낸다.
독자는 결국 알게 된다.
클라우스는 루카스의 상상의 인물이고 자신을 또 다른 삶 속에 투영함으로써 현실로부터의 자유를 꿈꿨다는 걸. 그 상상으로 삶을 버텨나갔고 빅토르가 언급했던 한 권의 책을 써 내려간 것이다.
1,2,3부를 거치면서 어린 쌍둥이의 치열한 살아남기,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가치들이 과연 진짜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 속에 빠지게 된다.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선악의 혼재된 모습 속에서 보편타당하다는 것들의 진정성과 가치로운 것들에 심한 혼란이 온다. 이런 혼란함 속을 정신없이 유랑하며 루카스와 클라우스를 쫒는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는 오히려 맑아지는 느낌이다.
결국 한 권의 책을 완성한 것이기에.
그것이 특별한 책이던 보잘것없는 책이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혜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