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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May 18. 2024

편안한 공간

 

 우리 집은 냉장고를 두기 어려운 주방 구조를 가졌다. 베란다에서 내 방으로 냉장고를 옮긴 뒤 내 방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짝꿍은 작디작은 저번 집에서부터 줄곧 혼자만의 공간을 향유할 내 모습을 기대해 왔던 터라 냉장고 들이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래도 냉장고에 가기 위해서 추위를 이겨내야 했던 겨울을 떠올려보았을 때 편의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의 우려에도 이 일을 진행했어야만 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내 방 안의 모든 것들이 불편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자주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방과 이어진 세탁실에서 가끔 누군가가 버리는 음식물 냄새 같은 것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올 때면 미리 준비해 둔 밀랍초나 유칼립투스 오일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냄새 때문이 아니더라도 작업실은커녕 내 덩치보다 훨씬 큰 냉장고라는 룸메이트와 나눠 쓰게 된 신세가 된 것만 같아 자연스레 침실과 거실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날따라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푸르렀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방을 한번 쭉 둘러보고는 책상을 거실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거실의 창밖 풍경은 하늘과 나무가 풍성했기에 답답했던 기존의 방과는 대조되는 느낌을 주었고, 분명 새로운 마음으로 집중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내가 머물렀던 방은 이제 주방의 연장선처럼 변했다. 팬트리가 들어서고, 냉장고와 그곳에 깔끔하게 정돈된 음식 재료들은 요리를 훨씬 즐기고 음미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화장대도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아침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예전에는 화장품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헤매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 그 질서 정연함 속에서 차분함을 누린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청소에 대한 관심이 늘기 시작하면서부터 깨끗해진 공간이 주는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많은 물건이 보이지 않는 주방, 그리고 항상 정돈된 방 안의 모습, 이제는 책상이 자리 잡은 거실의 확장된 공간은 일상에 작은 마법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침에는 블라인드 사이 햇빛을 맞으며, 저녁에는 테이블 조명을 켜고 큰 창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할 일을 한다. 11개월째 살고 있는 집이지만 새삼스럽게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든다.


 나에게 정리와 청소는 단순한 집안일이 아니라,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중요한 의식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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