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나를 프린세스라고 부른다

나는 얼마나 더 이 공주직을 연장할 수 있을까

by 재깅



공부 안 하면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하게 돼요.


모 개그맨이 티비에서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다. 하지만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일한다고 해도 그게 꼭 좋은 직업이라는 보장도 없지. 가령 백화점 판매원은 어떠한가. 백화점이야 말로 더울 때 시원하고 추울 때 따듯한 곳의 대표 격인데 말이야. 창고에서 꺼내온 아동복을 진열대에 걸며 그 문장을 곱씹어본다.


내가 일하는 백화점 4층은 아동전용매장으로, 각종 키즈 브랜드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겨우 찾은 일자리다. 내가 일하는 점포의 이름은 프린세스 디O니. 이곳은 디O니사에서 만들어 낸 각종 공주캐릭터들이 그려진 아동용 드레스와 포크스푼세트, 물병, 도시락, 에나멜 가방, 구두 등으로 가득 찬 꿈과 희망의 나라다. 공주에 관심이 없는 아이라도 한 번쯤은 쫑쫑거리는 짧은 보폭을 멈춰 설 만한 곳. 덕분에 이 공주나라 앞에선 엄마와 아이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나는 짜증이 난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모르는 척 공주 아이템들에 앉은 먼지들을 터는 시늉을 하곤 한다.


왜 아이들은 공주가 되고 싶어 하는 걸까. 나도 한 땐 엄마의 손을 잡고 요술봉을 사달라고 떼를 썼던 적이 있었나? 기억이 희미하다. 어쨌든 아이들은 이 가게에 있는 것들을 손에 넣게 되면 공주가 될 수 있다고 철썩 같이 믿는 게 분명했다. 하긴, 제품 가격을 보면 집에서 공주나 왕자 대접을 받는 애들만 살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공주들은 대부분 비싼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 프린세스!


이것은 나를 부르는 소리. 그들은 나를 프린세스라고 부른다. 서로의 이름 따위는 모른다. 일 하는 사람들은 자주 바뀌지만 점포의 이름은 폐점하기나 교체되기 전엔 좀처럼 변하는 법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서로가 합의한 암묵적인 룰같다. 제이O시에서 일하는 아줌마는 제이O시고, 더데이O에서 일하는 오빠는 더데이, 프린세스 디O니에서 일하는 나는 프린세스인 셈이다. 과연 나는 몇 대째 공주이려나.


어쨌든 이곳에서 이름으로 불리는 것보단 낯간지러워도 공주로 불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손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는 것이 현실의 내가 아니라 신데렐라처럼 뭔가 울만한 사연이 있는 공주같이 느껴지니까.


- 프린세스! 손님!


내가 미처 손님을 보지 못하고 쪼그려 앉은 채 바닥 닦는 일에 열중하고 있으니 맞은편 안경원 언니가 날 부른 것이었다. 백화점 바닥을 닦는 프린세스. 정체를 알 수 없는 웃음이 터지려고 했지만 꾹 참는다. 서비스업 종사자가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웃음을 짓는 건 금기다. 친절 이외의 웃음은 손님의 비위에 거슬릴 수도 있고, 거슬린 비위는 컴플레인으로 이어진다. 또 몇 달 동안 구직사이트를 뒤지며 읽히지도 못할 이력서를 뿌리기는 정말 싫다. 그러니 이 웃음은 필사적으로 삼켜야 한다.


바닥을 닦느라 숙였던 몸을 일으켜 손님으로 보이는 모녀에게 다가가니, 분홍색 점퍼를 입은 꼬마가 엄마 손을 꼭 잡고 디즈니 공주들이 그려진 가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줍어하며 엄마의 뒤로 몸을 반쯤 숨기는 여자아이. 이제 진짜 프린세스가 나설 차례인가. 나는 보이지 않게 재빠른 동작으로 쥐고 있던 손걸레를 매대 틈 사이로 내팽개쳤다.


꼬마 손님의 머리핀이 티아라 모양인 것을 발견했다. 물건을 파는 데엔 늘 요령이 필요하지.


- 어머, 멋진 왕관을 쓴 공주님이 오셨네요? 예쁜 공주님, 가방 한 번 매 보시겠어요?

하고 준비된 멘트를 날리니 아이가 엄마 뒤에서 부끄러운 듯 몸을 꼬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가방을 아이에게 매 주며 가방 줄을 키에 맞게 줄여주고, 아이를 데려가 전신거울에 비춰 준다.


- 너무 예뻐요 공주님! 아름다워요!


옆에서 시중을 드는 하녀처럼 딱 적당할 만큼 호들갑을 떨어본다. 아이의 눈은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떠날 줄 모른다. 이것만 있으면 공주가 될 수 있어. 분홍색 에나멜 가방에는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진짜 디O니 공주가 그려진 가방을 고사리같은 손으로 꼭 쥔 채, 아이는 열망이 담긴 눈으로 엄마를 바라본다.


- 아휴 얘는. 집에 이런 거 한가득이잖아.


엄마가 아이를 말려 보지만, 아이는 내가 매 준 가방을 도통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으으응~'하며 몸을 양옆으로 흔드는 아기에게 졌다는 표정으로 엄마는 지갑을 열어 내게 카드를 준다. 나는 모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내밀어진 카드를 받았다. 공주가 되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이의 환상을 깨지 않도록, 재빠르지만 서두르는 인상을 주지 않고 결제를 마친다.


이것이 그야말로 디O니에서 추구하는 정신 아닌가? 디O니 아일랜드엔 모기가 없다. 원래 모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조건인데 아이들의 꿈과 환상을 지켜주기 위해 모기를 없애려고 별 짓을 다 한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디O니에는 캐스트들이 다닐 수 있도록 설치한 지하 비밀통로가 있다. 그러니 나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컨셉에 충실한 것뿐이다. 디O니라는 간판을 건 곳에 입사한 내겐 아이들이 공주가 될 수 있다고 믿도록 성심성의를 다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직사이트라면 이제 지겹다.


- 안녕히 가세요 공주님! 다음에 또 만나요!


아이는 만족스러운 발걸음으로 가방을 멘 채 엄마의 손을 잡고 에스컬레이터 아래로 사라진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오늘 쓴 금액이 카드값으로 나오기 전엔 아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한 건 올렸네!' 맞은편 안경원 언니가 장하다는 듯이 말해주었다.


나는 얼마나 더 이 공주직을 연장할 수 있을까. 오늘 올린 건수가 부디 도움이 됐기를 바라며 아까 내팽개친 손걸레를 집어 들었다. 어쨌든 나는 당분간은 프린세스일 예정이다. 바닥을 닦고, 잘못된 경어를 남발하며 주니어들의 사이즈를 물어보는 아이러니한 프린세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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