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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y 15. 2024

할머니의 수술에 엄마의 신장을

#8번째 단상 - 수술에 대하여

절망스러운 순간에 가장 해서는 안되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건 바로 이곳이야말로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 없다고 믿었지만, 인생의 최하층에서 더 떨어질 구멍을 발견한 순간 절망은 제곱이 되어 돌아온다.


사업으로 번창했던 우리 가정이 한순간에 몰락하고, 재기하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쳤지만 손대는 것마다 망하고, 티브이에서만 봤던 빨간딱지가 생각보다 빨갛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시기에 나에게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왔다. 우리 가족은 왜 이리 불행할까. 아버지는 왜 하루 종일 술만 마셔댈까. 나는 왜 15년간 살았던 동네에서 떠나야 할까. 방은 세 개에서 두 개로, 다시 한 개로 줄었고, 그만큼 가족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도 줄어들었다.


우울증 초기증상이 반갑게 찾아오자 나는 군대에 도망치듯이 입대했다. 그리고 더는 불행해질 수 없다고 믿었던 나는, 훈련소에서 처음 따낸 부모님과 통화에서 할머니의 수술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런, 밑바닥이라고 말하지 말 걸 그랬다.




할머니의 신장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직계가족 중에 장기가 적합한 사람은 없었고, 장기 기증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우리 가족은 결국 내 어머니의 신장을 이식하기로 결정했다. 아, 나는 이 사실을 통보받았을 뿐이니 우리 가족이 아니라 나를 제외한 가족이 맞는 표현이겠다.


전화를 마치고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와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할머니에 대한 염려가 아닌 가족에 대한 분노였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사항을 나 없이 의논할 수 있지? 난 아직도 부모님께 어른으로,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가? 게다가 어머니라니, 내 어머니의 신장이라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게 이런 것일까. 눈물의 근원을 모른 채 한참을 서서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생각이 짧았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당시 나는 아버지에게 ‘할머니는 할머니지만 그래도 내 엄마에요. 나는 엄마가 더 소중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누구보다도 힘들었을 사람은 우리 아버지였을테지.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의 배를 갈라야 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하고, 괴로운 현실인가. 새벽에 눈을 비비며 불침번을 서야 했던 고통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술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할머니의 나이와 건강상태를 고려했을 때 수술이 위험하다고 의사가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수술을 받지 못한 나의 할머니는 3일에 한 번씩 왕복 3시간의 거리에 있는 병원에서 투석을 받으신다. 병원에 도착하면 1시간 동안 몸에 있는 피를 쫘악 빼고, 다시 1시간 동안 몸에 피를 쭈욱 밀어 넣는다. 할머니의 표현 그대로 억지로 삶을 살아가는 기분이란다.


할머니의 수술이 취소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다들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 며느리의 신장을 내가 어떻게 이식받냐고, 짐이 될바에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하셨던 할머니는 아쉬웠을까? 수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사랑하는 두 사람을 모두 잃을 수도 있었던 아버지는 안도했을까?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할머니를 사랑했을까? 아버지의 가슴 정중앙에 빼낼 수 없는 대못을 박아버린 나는 내가 했던 말을 후회했을까?


할머니가 투석을 받은 지 6년 차.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꼭 만난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되는 한 어떻게든 만날 구실을 찾는다. 아버지는 하루에 한 번씩 할머니께 전화하고,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어머니께 전화한다.



나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어머니.

부자(父子)는 매일같이 어머니의 건강을 살피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서로의 어머니에게 주었던 큰 상처를 되새긴다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나와 당신의 어머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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