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째 단상 - 허무에 대하여
허무주의란 무엇인가. 사전적, 철학적 의미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느끼는 허무주의는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길 포기하는 것이다.
동물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더 살기 위한 생존의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의 시각에서 동물의 삶은 허무하게만 보인다. 단순히 수명을 늘리는 것은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의미를 추구한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에게는 과거부터 미래의 정방향 순서대로 더 ‘잘’ 살기를 원한다.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의미 있는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것이다.
사람마다 ‘잘’ 사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수 세기 동안 인간에겐 경험이 축적되어 정형, 혹은 규범화된 잘 사는 방법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물질적/정신적 풍요’ ‘지식의 탐구’ ‘새로운 발견/발명’이 그 예다.
그렇다면 과연 위와 같이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은 정녕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자연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분명 이 행위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에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렇다. 인간은 무(無)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통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박이문 철학 박사는 자신의 저서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에서 인간의 의식을 마이더스 왕의 손과 같다며 이런 말을 했다. “마이더스 왕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바뀌듯이 인간의 의식이 닿는 모든 대상, 행위,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의미로 변하게 마련이다.” 이 말은 곧 모든 행위에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 아닌, 인간이 모든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허무주의자들은 마이더스 왕의 저주에서 벗어나 모든 의미부여를 포기하고 자유로워지길 원하는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본질이자, 단 하나로 존재하는 의미인 것인가? 인간은 정녕 마이더스 왕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순 없지만 이 단상을 쓰며 하나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의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의미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자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우리가 부여하는 모든 의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인간이 자연 그 자체가 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마이더스 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의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허무해하지 말자. 어떠한 말이든, 어떠한 행동이든 그것엔 나름대로의 의미가 존재한다. 마이더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건 저주지만, 인간에게 행위하는 모든 것이 의미로 변하는 건 축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