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인생 2막의 시작.
남자가 무슨 장발이야?!
흔히 인생의 교훈을 얻거나 깨달음을 느낀 순간, 자신의 인생이 180도 바뀌어 버린 순간을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라고 한다. 사람들은 보통 유명한 강연을 듣거나, 책에서 지혜를 얻거나, 혹은 실패를 마주했을 때 큰 깨달음을 얻고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정한다. 과거의 부끄러운 나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겠다고 자신의 인생을 휘릭 뒤집는다. 나 역시 인생의 방향이 뒤집어진 터닝포인트가 존재했는데, 그것은 바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교 3학년, 법학관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있던 법학도는 우연한 계기로 인해 장발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내가 머리를 기르게 된 이유는 굉장히 단순했다. 나는 평소에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남자 캐릭터의 외모를 보고 그의 성격을 짐작하는 것을 즐겼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외모는 현실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다양한 색깔과 복장으로 가득했고, 화려한 포즈와 독특한 컨셉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시키기 충분했다. 때문에 나는 직접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시청하지는 않지만 등장하는 캐릭터의 외모와 목소리만으로 머릿속에서 새로운 만화를 그려내곤 한다.
그런데 나의 요상한 취미가 반복될수록 특이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남자 캐릭터의 머리가 대부분 길다는 것이었다. 물론 짧은 머리를 가진 캐릭터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주인공이 아닌 경우가 많았고, 동료무리 가운데서 멋진 포즈를 잡고 의기양양하게 서있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앞머리가 눈을 찌르도록 길거나 완전히 덮기도 하였다. 특히 2010년대부터 시작한 대한민국의 투블럭 열풍(?)과 달리 옆머리를 짧게 친 캐릭터 역시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왜 주인공들은 다 머리가 길까?" , "앞머리가 눈을 찌르면 안 아플까?" 내가 유독 좋아하는 캐릭터 역시 앞머리가 한쪽 눈을 가릴 정도로 긴 장발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고, 옆머리와 뒷머리는 지저분할 정도로 뻗쳐 있었다. 나는 '머리를 직접 기르면 조금 더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생각과 함께 '왜 현실의 남자들은 대부분 짧은 머리를 고수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직접 머리를 길러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방금 전, 내가 "다짐"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남자가 머리를 기를 때는 왠지 모를 용기가 필요하다. 머리를 기르고 한두 달 뒤에는 "너 미용실 갈 때 됐는데?"라는 말을 수없이 듣게 될 것이고, 머리를 기르는 중이라고 하면 연예인들의 어울리지 않는 장발사진을 보여주며 극구 말리기도 한다. 거지존은 또 어떠한가. 애매하게 기른 머리를 감추기 위해 매일 모자를 쓰느라 안 씻고 다니냐는 말도 꾸준하게 듣는다. 사람을 마주할 때 처음 보는 곳이 얼굴과 머리이니 친한 지인들은 만날 때마다 나의 머리에 관심을 아끼지 않는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빛이 내 머리카락을 향할 때면, 나는 다시 한번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참으로 민망했다.
주위의 소음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가 1년간 머리를 기른 이유는 바로 "지금 아니면 언제 해봐?"라는 마음 때문이다. 나는 대학생이었고, 20대 초반이었으며, (아쉽게도 현재는 20대 중반이 되었다.) 장발을 싫어할 애인도 없는 상태였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법학과를 졸업하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한 뒤, 20-30년간 같은 조직에서 몸을 담아 반복되는 삶을 살 것만 같았다. '대학생인 지금이 아니면 머리를 기를 기회도 없잖아? 한 번쯤은 소심한 일탈을 해도 되지 않을까?' 평소라면 이런 작은 꿈틀거림에도 금방 겁을 먹고 정해진 레일에 몸을 맡곁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딱 한번, 멋들어진 장발을 뽐내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딱 한 번의 희미한 욕망이 나를 이끌었고, 지금 아니면 앞으로는 절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나의 머리는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이 선택으로 인해 지금까지 걷던 포장도로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대한민국의 정규교육을 아주 착실하게 밟아온 나는 비포장도로의 아름다움과 위험함을 온몸으로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