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이 좋다

어쩌다 도전한 10km 마라톤

by 지하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작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반오십”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는 점. 그리고 3월이 시작되어도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군휴학을 제외한 휴학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의미 있는 휴학생활을 즐겨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 꼭 해야 할 일들을 달력에 적으며 변화하는 나를 상상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새해가 밝아도 예전만큼 기운이 넘치지 않았고, 오히려 대학교 새내기시절 아저씨라고 생각한 “반오십”의 칭호를 직접 획득하니 온몸에 힘이 푸욱 빠졌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른 걸까. 부모님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나. 많이 늙은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주저앉을 수만은 없으니 뭐라도 해야 했다. 아저씨는 그래도 참을 만하지만 백수 아저씨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별명이다. 나는 책상에 놓인 빳빳한 신년 달력에 맨 첫 번째로 적은 “운동하기”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태양이 퇴근도장을 찍을 때쯤 집 앞 천으로 나와 5km씩 뛰었다. 좋아하는 일본 노래를 틀고 시원하다고 말하기엔 조금 많이 차가운 바람을 마시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 평소 몸을 움직여 버릇하지 않아 딱딱히 굳은 내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고작 3km를 지난 몸뚱이는 나를 그만 괴롭히라며 거친 숨소리로 나에게 항의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고, 평소처럼 나에게 푹신한 침대를 대령하라고' 말이다. 여기서 포기하면 정말 끝장이다. 고작 마음먹은 지 하루 만에 포기한다면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백수아저씨 확정이다. 나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붙어보자고 했고(어쨋든 둘 다 나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여름철 더위에 흠뻑 땀에 젖은 사람처럼 온몸에 땀을 가득 묻혀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가. 러닝을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나자 헥헥 거리는 횟수는 조금씩 줄어들었고, 5km를 다 채워도 왠지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러닝뿐 아니라 팔굽혀펴기와 스쿼트 등의 홈트도 병행했기 때문에 이대로만 간다면 전봇대에 붙여있는 몸짱까지 얼마 안 남았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생겼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슬슬 똑같은 운동이 지겨워졌을 무렵 산책로 육교에 걸린 현수막이 나의 눈을 사로잡았는데, 그것은 바로 <경기 국제 하프 마라톤 대회>였다. “그래. 바로 저거다! 나의 지루함을 달랠 다음 장난감은 바로 너다!” 나는 그날 운동이 끝난 뒤 바로 집으로 들어와 겁 없이 10km 코스를 신청했다. 러닝을 시작한 지 고작 한 달이 된 풋내기의 근자감을 뿜뿜 내뿜으면서 말이다.


마라톤을 신청한 달에 나는 어쩌다 한 공공기관에서 인턴근무를 하게 되었고, 난생처음 맛본 9시부터 6시까지의 처절한 직장인의 사투에 혼이 빠질 대로 빠졌다. 긴장된 몸과 혼란스러운 정신이 만든 결과물은 끔찍하기 그지없었고, 제발 오늘은 아무 실수도 하지 않길 바라며 시계의 앞자리가 6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직장에 다닌다는 것은 운동을 거를 수 있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였고, ‘하루 정도 쉬어도 괜찮겠지’라는 마음은 계속해서 쌓여 결국 10km를 뛰어보지도 못한 채 마라톤 당일을 맞이했다.


새벽 6시. 평소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시간에 눈을 떴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며 “왜 나는 사서 고생을 하는가”라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 새벽바람과 함께 맞이한 첫차에서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무려 1시간 반이라는 거리를 움직인 후에야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경기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활기차 보였다. 마라톤 프로 선수, 외국인, 초등학생, 어르신, 가족 등 남녀노소 불구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몸을 풀며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사람들이 출발 선에 나란히 줄을 섰고 “마라톤은 실패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성공과 과정만이 있을 뿐이죠”라는 사회자의 말과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5...4...3.. 약 5,000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화이팅을 외치며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경기가 시작됐다.


사방에서 내뿜는 뜨거운 에너지 때문인지 새벽에 느꼈던 시린 바람은 말끔히 사라지고 주위에는 오직 완주를 위한 기합으로 가득했다. 차량이 통제된 도로를 내달리는 것이 내심 신기했고, 이른 아침부터 우르르 뛰고 있는 수천 명의 러너들을 본 행인들은 휘둥그레 한 눈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중간에 쓰러지더라도 달리기를 멈추지만은 말자’라는 다짐으로 1시간 이내에 들어오는 것을 목표로 했고, 오늘 처음 뵌 뒤통수와 꾸벅 인사하며 쉬지 않고 뛰었다.


상쾌한 기분은 맞지만 힘든 건 역시 힘든 거다. 아무리 흥분으로 가득한 마음이라도 숨이 가빠오고 무릎이 쑤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매번 연습한 달리기의 종점인 5km의 푯말을 보자 거짓말처럼 몸에 힘이 주욱 빠졌고 이제 그만 뛰고 싶다는 마음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달리기를 멈추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고 나를 제치고 앞서가는 초등학생을 보자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달리기를 멈춘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냅다 뛰었다. 뛰는 내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어서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반환점을 돌고 7km의 푯말이 보이는 순간, 다시 한번 그만 뛰고 싶다는 위기가 찾아온 순간 누군가의 응원소리가 나의 귀에 박혔다.


“젊음이 좋다!”


그 소리는 중간 기록을 체크하는 한 자원봉사자의 외침이었고, 나의 어머니뻘 되보이는 아주머니의 응원이었다. 추운 날씨에 코와 귀가 빨개지면서도 그녀는 아무 대가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열정을 나누고 있던 것이다. 그래. 젊음이 좋다. 건강한 신체로 뛸 수 있는 이 젊음이 좋다. 그녀의 응원에 바닥을 보이던 힘이 거짓말처럼 샘솟기 시작했고 끝가지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대학생에게 나름의 거금인 40,000원을 자발적으로 지불하고, 변화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혼자 마라톤에 참가한 내가 한순간에 자랑스러워졌다. 내가 지금 이 순간 뛸 수 있다는 것은 “젊은 나이”가 아닌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다는 “젊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되뇌며 힘차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수원 월드컵 경기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삐 소리와 함께 도착지점에 다다른 순간에도 이상하게 힘이 들지 않았다. ‘해냈다’라는 마음이 가득해서일까 거짓말 조금 보태면 5km는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상태였다. 뒤따라서 결승점에 도착한 다른 선수들 역시 얼굴 한켠에 행복감이 묻어있었다. 각자의 목표는 다르지만 완주하겠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다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모습이 무척 감동스러웠다. 57분 28초 47. 약 2분 30초를 남기고 목표기록인 1시간 이내의 완주를 성공했다. 단 한 순가이라도 달리기를 멈췄다면 이룰 수 없는 기록. “젊음이 좋다”는 응원이 없었으면 달성하지 못했을 기록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탈피하기 위해 스스로 다짐하고 끝내 달성한 마라톤 완주. 내게 기록보다 중요한 것은 해냈다는 그 성취감이다. 스스로를 믿고, 또 믿을 수 있게 도와준 그 외침을 기억하며 지금 이 순간, 목표를 향해 달릴 수 있는 나는 지금의 젊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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