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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Jun 06. 2024

어른이 된다는 건 「쿤의 여행」

[소설]『러브 레플리카』中 「쿤의 여행」 - 윤이형 (문학동네,2016)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 안정적인 삶을 단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신 나의 부모님은 내가 공무원이 되길 바라셨다. 나는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안정적인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부모님의 뜻에 따라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어진 나의 대학 생활은 모두 나의 쿤이 담당했다. 친구들이 공부할 때 쿤은 똑같이 책을 펼쳤고, 공무원을 꿈꾸고 있다는 말에 쿤도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1학년이 끝났으니 군대에 다녀오고, 전역한 뒤엔 시험을 준비하란 부모님의 말씀에 나의 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쿤의 뒤에 업혀있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불행히도 내 주변엔 ‘이제 무엇이든 되고 싶은 것이 되어봐’라고 말하는 선배가 없었다. 나 역시 주인공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내가 배운 사랑이라곤 쿤을 사랑하는 것밖에 없었다. 내게 있어 쿤은 부모님의 기대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의 바람과 염원대로 쿤을 사랑했고, 그만큼 나의 쿤은 몸집을 불려 나갔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17살의 어린 나는 쿤의 등에 찰싹 달라붙은 채 무럭무럭 자라나는 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전역 후 우연히 듣게 된 국문학 수업에서 나는 쿤과의 이별을 결심했다. 희망 직업란에 처음으로 공무원이 아닌 작가를 적었다. 부모님 몰래 국문학 수업을 듣고, 쿤 몰래 노트에 끄적끄적 글을 썼다. 동기들이 취업을 준비하며 토익책을 펼칠 때, 나는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읽고, 서평을 썼다. 그리고 부모님께 1년간 휴학하고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작년 봄, 나는 쿤과 헤어졌다. 법적으로 성인이 된 지 5년이 지났지만, 나는 그날에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윤이형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 中 단편 「쿤의 여행」


이 소설은 40대이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나’가 쿤을 떼어내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성장소설이다. ‘나’는 이십여 년간 자신의 삶을 대신 살아왔던 쿤과 작별하며,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 한다. 하지만 어떤 모습이든, 무엇을 하든 이해해 주었던 ‘나의 남편’은 쿤을 떼어내는 것을 끝까지 설득한다. 남편에게 아내는 ‘나’의 모습이 아닌 ‘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가 쿤 없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우려보다 더 이상 ‘쿤’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남편은 더 아쉬워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나’는 쿤과 이별했다. 어른이 되길 선택한 것이다.


쿤과 이별한 ‘나’는 홀가분해진 기분을 느끼지만, 쿤 없이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자연스럽게 쿤과 이별한 옛 애인 ‘C’와 달리 ‘나’는 인공적인 수술을 통해 쿤을 떼어냈기 때문이다. ‘나’는 다이어트 비디오에 나오는 사람처럼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끝도 없이 반복하며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왼쪽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고생하는 것과 크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억지로 고생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이민자들을 위한 기사를 꼭 써달라고 한 ‘S’와 신문사 건물에서 경영진과 맞서 싸우는 ‘A’에게 전해지 못했던 메일을 쓰고, 진작에 쿤과 이별한 ‘C’에게 조언을 구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그리고 이십 년 전 열지 못했던 희극 동아리방의 문을 열며 ‘나’는 마침내 어른이 되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딘다.


‘나’가 희극 동아리에서 만난 ‘더벅머리 선배’는 ‘나’보다 20살은 더 어렸음에도, 배우의 꿈을 꾸며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그녀를 ‘나’는 ‘선배’라고 칭한다. 대학에 다녔던 사 년 내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나’에게 비록 배우가 되지 못할 걸 알면서도 희극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그녀’는 이미 성숙한 어른이었던 것이다. ‘선배’는 나에게 울어보라고, 웃어보라고, 또 욕해보라고 하지만, 지금껏 간단한 감정의 표현조차 쿤이 대신 해줬기 때문에 ‘나’는 어색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 무엇이든 되고 싶은 것이 되어봐’라는 선배의 말에 ‘나’는 쿤을 감싸안은 기억을 떠올리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쿤은 외부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자아다. 부모님의 기대나 이상적으로 규정된 삶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모습,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적 상황에 맞춰 살아가거나, 사회적 시선 때문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모습 등 각 개인마다 쿤의 형태는 다양하다. 주인공이 ‘쿤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한 번이라도 집을 나서 볼 수나 있었을까‘라고 말한 것처럼 외부의 압력을 대신 수용하는 쿤은 성장기에 필수적인 존재다. 무턱대고 알을 터뜨리면 새는커녕, 병아리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쿤에 의지하는 삶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성장은 멈추게 된다. 어른이 되어야 할 때 어른이 되지 못하고, 본연의 자아가 나서야 할 때 껍질에 가로막힌다. 결국, 어른이 된다는 건 쿤과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몸집이 어느 정도 자라났을 때 스스로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 선택이 설령 고통스러울지라도, 자신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작중 ’C’가 ‘돈을 벌고 그 외의 시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한 것’만으로 자연스레 쿤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있지 않을까.


주인공이 아버지를 만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그날을 떠올려 본다. 부모님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숨기지 못하신 작은 한숨. 지금껏 잘해왔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냐는 꾸중과 안정적이지 않은 삶이 얼마나 괴로운지에 대한 설교. 하지만 내 눈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쿤은 보이지 않았고, 그것이 내겐 분명히 존재했다. 부모님은 내가 아닌 나의 쿤을 바라보며 설득하고, 애원하고, 훈계했다. 가만히 앉아 그 말을 듣던 나의 쿤은 살며시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정말 나랑 헤어져도 괜찮겠어?” 나는 선뜻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네가 없어도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쿤이 없는 세계는 너무도 위험하고 불안정할 게 뻔했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을 살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쿤이 아닌 내 손으로 문을 열고 싶었다. 나는 쿤을 향해 불안한 눈빛을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쿤은 다행이라는 듯한 모습으로 내게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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