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종이달』 - 가쿠다 미쓰요 (위즈덤하우스,2014)
지인들에게 평소 스트레스가 쌓일 때 어떻게 푸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음식이나 쇼핑과 같은 ‘소비’라고 말한다. 나 역시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충동적으로 지갑을 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낀다. 오늘 읽은 책은 이러한 소비에 중독되어 한순간에 일상이 망가진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가쿠다 미쓰요의 장편소설 <종이달>이다.
소설은 주인공 ‘리카’가 태국 치앙마이에서 도피 생활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평범한 계약직 은행원이었던 리카는 근무지에서 1억 엔(한화 약 10억 원)을 횡령한 뒤 해외로 잠적한다. 자국인 일본에선 한 개인이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훔쳐 달아났다는 것에 대해 크게 놀라지만, 곧 언론의 관심은 사그라든다. 하지만, 과거 그녀의 성실함을 알고 있던 지인들은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녀가 돈을 훔친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받는’ 남자 때문이다. 보통의 범죄자들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돈을 훔치지만, 주인공 리카는 다르다. 그녀는 40대의 나이가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여성이다. 그녀는 평범한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남성과 결혼하여, 평범한 전업주부가 되어,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남편의 출근 도시락을 싸고, 남편이 회사에 출근하면 집안일을 한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까지 저녁을 준비하는 하루가 1년 365일 반복된다. 누군가를 위해 오차 없이 돌아가는 시곗바늘 같은 삶이 잔인할 정도로 무섭게 느껴진다.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느낀 리카는 결국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시내 은행의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한 리카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 월급이 들어온 것을 보고 뿌듯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번 돈으로 백화점에서 물건을 구입하며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무용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사회의 구성원 중 한 명이 될 수 있음을 느낀 이 시점이 나는 리카가 살아있음을 느낀 첫 번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계약직으로 영업활동을 하며 평판이 좋았던 리카는 단골고객의 자택에서 고객의 손주인 대학생 ‘고타’를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서 남편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정을 느낀다. 처음에는 당연히 이성적 끌림도, 호감도 아니었다. 하지만 ‘고타’는 결혼 생활 내내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남편과 달리 끊임없이 그녀에게 감정을 표한다. 그 감정은 비단 사랑의 감정뿐 아니라 ‘당신은 쓸모 있어요’ ‘당신은 멋진 사람이에요’라는 진심 어린 관심이 포함된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리카는 이 시점에서 두 번째 살아있음을 느낀다.
죽은 듯이 살아가는 미카에게 타인의 인정과 관심은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리카는 고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비싼 화장품과 옷, 고급 레스토랑에 발을 붙이기 시작했고, 돈이 부족해지자 급기야 고객의 예금을 횡령하기에 이른다. 소설의 초반부 그녀가 태국에서 숨어 살게 된 이유다.
리카의 주변인들을 리카가 내연남인 고타를 위해 돈을 횡령했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리카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무리해서 돈을 썼다고 생각한다. 분명 첫 소비는 고타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타인의 돈을 훔치면서까지 소비에 ‘중독’된 이유는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감정들이 폭발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추어 영화제를 준비하는 고타처럼 20대 때 자신이 원하는 꿈을 찾지 못하고, 남편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무언가를 결제할 때마다 남편의 눈치를 봤던 리카에게 소비란 묶여있던 욕망의 유일한 탈출구다. 다만, 그 욕망을 둘러싼 풍선이 거대했던 것에 비해 수입이라는 구멍의 크기는 지극히 작았다.
단순히 돈을 주고 물건을 받는 행위가 소비의 전부는 아니다. 소비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한다. 가끔 백화점에서 비싼 물건을 구매하거나, 지인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할 때 ‘기분 낸다’고 말하는 것처럼 소비에는 성과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동한다.
‘자신은 선택받은 누군가이며, 살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고,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는’(p.159) 리카의 만능(萬能)감은 쇼핑을 통한 소비로부터 얻어진다. 그리고 이는 돈에 대한 그릇된 집착과 허영심으로 이어진다. 90년대 일본 사회의 전업주부에 대한 무시와 사랑받는 사람에게 버려진다는 두려움, 그리고 소비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 리카에게 황금만능(黃金萬能)주의는 당연한 진리였다.
소비는 분명 인간의 억압된 감정, 혹은 답답한 마음을 해소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소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한한 소비는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소비는 행복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돈 많은 백수가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돈으로 얼마만큼의 행복을 살 수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돈에만 집착하는 삶은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인공 리카가 대신 알려주었기 때문에 억압된 풍선의 바람을 뺄 다른 구멍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 최근 관심이 생긴 작가의 책이라 도서관에서 무심코 골라 읽었는데, 찾아보니 일본에선 이미 영화화되었고, 한국에서도 2023년 4월 넷플릭스에서 드라마화가 진행된 작품이었다. 입소문이 아닌 끌림으로 원작을 먼저 발견해 묘하게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