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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Feb 21. 2023

오늘의 메모가 사람을 바꾸는 이유

[에세이] <아무튼, 메모> 서평 - 정혜윤


우리는 끝없이 메모한다.


마트에 가기 전 메모장에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중요한 업무 사항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빨간색 볼펜으로 별모양을 그리기도 한다. 또 인화된 사진 뒷면에 그날의 날짜와 장소, 기분과 분위기 등을 기록하기도 하고, 감명 깊게 읽은 책의 한 구절을 노트에 옮겨 적기도 한다. 메모의 시작점은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무척 다양하겠지만 그 종착점은 대부분 비슷하다.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아무튼, 메모>를 쓴 정혜윤 작가는 라디오 프로듀서로 다수의 라디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삶을 바꾸는 책 읽기>, <그의 슬픔과 기쁨> 등을 쓴 작가이다. 작가는 1인 독립 출판사 세 곳의 ‘아무튼,’ 프로젝트에서 “메모”의 가치와 중요성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책은 메모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담긴 1부 <메모주의자>와 작가의 경험과 꿈이 메모로 나타난 2부 <나의 메모>로 이루어진다. 약 160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하루 이내에 금방 읽을 수 있는 에세이다. 해방촌의 한 독립서점에서 제목에 이끌려 구매하였다.




나는 메모광이다. 금방 까먹고 잊어버리는 성격 탓에 중학생 때부터 기억하고 싶은 말들을 노트에 한두 줄 적기 시작했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9단 책장의 한 칸을 꽉 채울 정도로 일기장과 노트가 가득하다. 가끔 나의 흑역사가 궁금하거나 글감이 필요할 때면 나는 수많은 노트 중 한 권을 골라 과거에 흠뻑 빠져들곤 한다. 흐릿한 글씨로 휘갈겨 쓴 2020년도의 “전역하고 싶다”메모와 힘 빠진 필체와 눈물의 합작으로 눅눅해져 버린 일기장의 2017년의 “수능 망했다” 메모. 로제 떡볶이를 처음 먹은 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적은 2019년의 “나의 소울푸드를 찾았다 !”메모까지. 찰나의 기억과 냄새, 감정의 울렁임이 반짝 빛을 내며 나의 기억샘을 두드린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지만 누렇게 색 바랜 노트를 넘길 때면 마치 내가 죽음을 앞두고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확실히 여타 향수보다 향이 가장 강한 건 과거의 냄새인 듯하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붙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 p.45


작가는 메모를 통해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이것이 메모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메모를 하려면 손을 움직여야 한다. 볼펜을 잡든 핸드폰의 메모장 어플을 켜든 자의적으로 무언가를 기록해야겠다는 마음과 함께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지금 나는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무엇을 남기고 기록하려 하는지” “빨간색으로 적을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글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누가 만든 지도 모르는 알고리즘에 중독된 사회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시도하는 AI가 판치는 세상에서 스스로 멈추고 생각하는 활동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작가는 메모하는 것을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지옥 같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내다”(p.69)라고 비유하며 사회의 로봇에서 탈피하는 것의 시작은 메모임을 주장한다.


“꿈은 다른데 꿈의 종착역은 같다. 거창하게 꿈을 이뤘다는 사람들의 결론도 ‘돈’이었다. p.94


이 글의 제목과 같이 메모는 사람을 바꾸는 힘을 갖고 있는데, 그 힘은 바로 “꿈”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메모를 하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꿈과 연관시킨다. 가령, 오늘날의 나처럼 글이 잘 안 써질 때면 “글이 잘 안써진다..”라고 적은 푸념은 “글을 더 잘 쓰고 싶다”의 열망으로 바뀌고 “어떻게 하면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까”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메모가 아닌 이상 스스로 적은 메모는 자신의 “생각”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고, 주체적인 생각의 종착지는 “꿈”에 대한 열망과 기원일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넘쳐흐르는 무분별한 정보와 획일화된 교육에 꿈을 단일화하기 시작했고, 모든 꿈의 종착지는 ‘돈’이 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 +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혹은 먹고사니즘) + 끝없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약해진 자아 + 이기주의”의 공식은 작가가 만든 나쁜 꿈의 제로공식이다. (p.91)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더 많은 지위와 권력을 얻고 더 많은 돈을 버는 것만이 우리의 목표이자 꿈이 되었다. 자본주의에 굴복하고 꿈꾸는 사람들을 철부지 취급하며 오직 ‘돈’을 좇는 데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메모를 하지 않는다. 돈의 자극적인 달콤함에 중독되어 버린 사람들은 과거 자신의 꿈이 담긴 일기장을 뒤적여 보더라도 “어쩔 수 없음”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꿈은 수단이었을 뿐 결국 꿈은 더욱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소비된다.




이 책은 메모를 신장시키거나 효율적인 메모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메모가 가진 사소한 힘. 그러니까 자신의 진정한 꿈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다. 메모를 통해 과거의 찰나, 특히 아름다운 순간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메모의 중요성이 아닐까 싶다.


기억은 금방 휘발된다. 그래서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한다. 꿈 역시 금방 휘발된다. 현실의 벽이라는 투명한 벽에, 사회의 규율이라는 노예정신에 우리는 타의적, 혹은 자의적으로 꿈을 잊어버린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메모를 해야 한다. 메모를 통해 끊임없이 꿈을 지켜나가야  한다. 작가는 “소득의 불안정은 꾸준히 사람을 위축시킨다. 꿈은 근심 걱정 없이 생계를 유지하는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할 수 있다.” (p.110)고 한다. 하지만, 설령 그 꿈이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돈’의 가치만을 좇고 있으니 그것이 더욱 평범하고 무(無)가치하다.


자신의 꿈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사람들, 혹은 그 꿈의 종착지가 오로지 ‘돈’으로만 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함과 동시에 과거의 메모를 찾아보길 권한다. 어렸을 적 자신의 장래희망을 휘갈긴 그림일기장, 어떠한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한 다이어리, 미래의 나에게 보낸 편지 등을 찾아보며 자신의 꿈을 되살펴보기 바란다. 그때의 다짐과 오늘의 내가 정반대의 모습이어도 괜찮다. 오늘부터 다시 메모를 시작하고 꿈을 적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조그마한 포스트잇, 읽고 있던 책의 한편, 스마트폰의 메모장 등 뭐든 상관없으니 잠깐 멈추어 스스로 생각한 뒤 메모를 시작해 보자. 오랜만에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그 느낌은 상당히 묘하면서도 유쾌한 짜릿함이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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