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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r 25. 2023

피식자로 살아가기

[소설] <채식주의자> - 한강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주된 이야기는 대부분 포식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말 한마디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분주해지는 정치인,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본가, 독점적으로 정보를 지배하고 생산하는 극소수의 집단 등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계급 피라미드에서 최상위 포식자에 위치한 이들의 이야기에 우리 사회는 집중한다. 때문에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사회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우리는 그 이야기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라고 착각하게 된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목표는 더 높은 사회적 계급에 올라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는 포식자가 되어버렸다. 피땀 나는 경쟁을 통해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서고,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돌파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노력의 모든 대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숫자와 결과가 모든 것을 증명해 주는 한국 특유의 관습 때문에 우리는 유년기 시절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끊임없이 누군가와 경쟁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큰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이러한 암울한 사회현상은 우리의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확률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포식자가 되는 것에 미쳐있을 때 스스로 그 길을 포기하는 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 "한강"의 대표작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영혜"다. 영혜는 사회적 관습인 포식에 잠식된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그들과 맞서며 포식의 길을 거부한다. 작품 속에서 영혜는 여성속옷인 "브래지어"를 착용하길 거부하고, "육식"을 거부하며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사회적 통념"에 맞서 싸운다. 어렸을 적 그녀의 뇌리에 깊이 남은 트라우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 순간의 번쩍임 때문이었을까. 하루아침에 속옷 착용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언하는 그녀를 주위 사람들은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p.60)


그녀를 둘러싼 포식자들은 그녀가 스스로 사회적 피라미드에서 내려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 가정의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의 아침상을 차려주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부부동반 모임에서조차 육식을 거부하는 모습을 못 마땅하게 여기며, 속옷을 입지 않아 젖꼭지가 튀어나온 것을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주인공 영혜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판단하고 강압적인 폭력을 행사하며 그녀가 원래대로 돌아오길 강요한다. 스스로가 선택한 삶을 인정하지 않고 어서 너도 예전처럼 사회에 복종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영혜는 끝내 다시 포식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육식을 중단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혜가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 피비린내 나는 고기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피비린내 나는 고기를 "당연시"여겼던 사회에 저항하는 것이다. 왜 여성은 당연하게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져야 하나. 왜 여성은 수동적인 존재로서 삶을 희생해야 하나. 왜 여성은 가부장적인 남성주의 사회에 순응해야 하나. 고기를 먹는 것이 이상한 행위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회에서 영혜는 채식을 선언함으로써 사회의 관습에 저항한 것이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
(p.43)

영혜를 피식자라고 표현한 것은 그녀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먹이뿐인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다른 생명체, 사람, 동물 등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들을 파괴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포식자와는 결을 달리한다는 뜻에서 그녀를 피식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수많은 생명체들로 이루어진 먹이사슬에서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주는 불쾌한 위화감을 자각하고 스스로 이치를 거부하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피식자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너는 왜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하게 굴어?" "왜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왜 쓸데없이 손해 볼 상황을 만들어?"와 같이 따가운 시선을 견디고 이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질책에도 불구하고 피식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사회에 순응하고 관습에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곧 상위의 포식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될 테니까. 


강력한 포식자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피식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은 바로 개체수를 늘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저항하기 위해 서로 뜻을 함께하고 연대함으로써 더욱 더 큰 목소리로 세상에 소리쳐야 한다. 나는 오늘도 이 사회에 만연한 포식자들과 맞서 싸우는 피식자들의 용기를 응원하고, 그 저항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나 역시 그들과 함께 맞서 싸우리라고 다짐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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