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하 Apr 21. 2023

인간시대의 끝이 도래했다.

[소설] <작별인사> - 김영하


본격 로봇이 세상의 중심인 시대다. 로봇에 의해, 로봇을 위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인터넷에 "로봇시대"라는 단어만 검색해 봐도 수많은 기사와 책이 등장한다. '로봇시대에서 살아남기', '성금 다가온 로봇시대', '로봇시대 생존법' 등 가까운 미래에 로봇이 인류를 이끄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예측한다. 로봇의 범위를 SF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로봇의 모습보다 더욱 확장시켜 생각해본다면 더욱 쉽게 이를 이해할 수 있다. 낮밤 구별 없이 24시간 내내 자동으로 움직이는 수많은 기계장치와 인공지능들. 이것들이 개발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원고지에 글을 쓰고 출판사 이곳저곳을 직접 뛰어다녔을 테다. 로봇없이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시대에서, 결국 인간시대의 끝이 도래했다.


지금이야 인간과 로봇을 이분법적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그조차 어려울 수 있다. 인공 구조물을 달고 있는 인간을 예시로 들어보자. 인간의 신체를 대체하는 부품을 단 인간은 과연 인간일까 로봇일까? 우리는 의족이나 의수를 찬 사람을 보고 로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SF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신체를 개조하고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은 이는 로봇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로봇인가.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도대체 무엇일까? 


김영하의 장편소설 <작별인사>에선 이와 같이 인간과 로봇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인간이라면 로봇과 달리 '자아'를 갖고 있으며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의식하는 한 로봇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법으로는 더 이상 인간과 로봇을 쉽게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인간의 지능까지 결합한 로봇을 기어이 만들어버렸으니.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알아보기 위해선 잠시 인간이 왜 로봇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먼저 알아보는 편이 좋겠다.



진화는 곧 퇴보하는 것


"귀찮지 않으세요? 왜 그걸 손수 하세요?" 내 질문에 그녀가 허리를 폈다. "기분 전환이 되거든. 이렇게 재미있는 걸 로봇을 시킬 수는 없지."
(p.32)


로봇이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키오스크', '로봇청소기', '공업용 자동화 기계'는 모두 인간의 노동효율을 증가시키기 위함이나 인간의 노동성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에 한 발 더 나아가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하기도 한다. 모든 로봇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로봇시대의 대전제(提)라고 생각했다.


그런 로봇이 이제는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한다. 인간이 만든 결과물로 인해 인간이 위협받는다는 말은 더 이상 영화에 나올 법만 한 얘기가 아니다. 최첨단로봇에 의해 인간의 일자리는 빠르게 대체되었고, 인간의 단순노동 일자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4차 산업 혁명은 말 그대로 혁명처럼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혁명은 우리가 겪어왔던 모든 것을 바꿨다. 직업의 가치와 정보의 옳고 그름은 재배열되어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가 믿었던 대전제는 점차 깨지고 있다. 로봇은 인간의 산유물이라는 믿음 역시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한 로봇을 만들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로봇을 만들고, 로봇이 세상의 주가 되어버리고, 인간은 그것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결국 인간과 완벽하게 유사한 로봇을 만든다. 이것이 이 소설의 주된 배경이다. 결말을 알기 때문일까. 책을 읽어가며 현대기술의 발전에 회의감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속 주인공 '철이'의 아빠(아빠가 아니라 로봇을 만든 개발자가 맞는 말이겠다)가 세운 최종 목표는 인간과 완벽하게 닮은 로봇을 만드는 것이다. 그 대상인 '철이'는 자신의 아빠를 따라 바깥세상에 나가기 전까지 자신을 완벽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인간과 가장 닮은 로봇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 애초에 그러한 로봇은 왜 만드는 것일까. 진화라는 것은 앞으로 전진하는 것만이 아니었나. 때로는 과거로 회기 하는 것 역시 진화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에 허탈함을 느꼈다.



휴머노이드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당신은 무엇이고 무엇이 되고자 합니까"
(p.228)


'철이'는 육체와 정신 모두 "인간적"으로 만들어진 로봇인 "휴머노이드"다. 그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태생은 로봇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철이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인간? 로봇? 혹은 사이보그? 인간과 99.9% 동일하지만 인간에 의해 생산되었기 때문에 로봇인가? 그렇다면 모든 신체가 99.9% 기계부품으로 되어있는데 인격체를 가졌다면 그 역시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는 무엇이 되고자 할까. 


책에서는 비슷한 예시를 들며 우리에게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현대의 우리에게 익숙한 "좀비물"로 말이다.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 바이러스가 감염된다고 가정했을 때 어디까지를 좀비로 봐야 하고,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봐야 할까? 몸이 부패되어도 자신의 "인간"이라는 의식만 있으면 그를 인간으로 봐야 하나? 그렇다면 아까의 문제를 대입해 보았을 때, 몸이 기계여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의식을 갖는다면 그를 인간으로 봐야 함이 맞지 않나? 


이러한 문제는 확실하게 답할 수 없는 것이 맞다.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인간이 풀지 못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저마다의 정답을 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고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에 대한 답은 "휴머노이드"가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 인간 자체도 스스로를 인간인지, 로봇인지 구별해내지 못하는 상황에 다른 이의 "정체성"을 판단할 자격은 없다. 설사 그것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인격을 부여한 이상 판단은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그것이 인격의 가치이자 존재의의니까. 



역시 인간이라 함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p.295)


아무래도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인간이기 때문인 듯하다. 문학과 예술, 철학이 주는 가장 큰 힘은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가치를 찾는 일이다. 여기서 쓸모없다는 것은 로봇의 입장에서 한 말인데, 로봇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우주의 깊이를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며, 외계의 존재와 소통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p.226 참조) 오직 프로그램의 논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로봇은 이러한 감정을 느끼려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로봇에게는 호기심, 욕망, 신념 따위의 감정이 없기 때문에 로봇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까지는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혹시 모른다 나 역시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휴머노이드'일수도) 그러나 내가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내게 "인간성"이 존재하는 이상 나는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내가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무엇이 되고자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다른 이가 아닌 나의 것이다. 그러니 인간신대의 끝이 도래했다고 해서, 인간과 로봇을 더이상 구별할 수 없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지 말자. 어떤 시대에 살더라도 당신은 당신이고, 당신의 인생은 당신의 것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내 책꽂이는 잡탕 플레이리스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