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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Apr 26. 2023

어른만을 위한 잔혹동화

[소설] <저주토끼> - 정보라

어른의 마음이란


흔히 동화는 어린이를 위해 동심을 바탕으로 지은 이야기를 말한다. 아이들의 환상을 지켜내기 위해, 혹은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어른들은 아이에게 동화를 읽힌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잔혹한 세상에 발을 들이기 전 동화를 통해 세상을 맛본다. 그 속에는 확실한 선과 악이 존재하고, 나름대로의 정의가 존재하며, 다양한 교훈이 포함되어 있다. 예방접종을 맞듯 아이들은 동화를 통해 세상에 대한 면역력을 기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도 존재했다. 숫자는 어른을 가리키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혹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 어른들만을 위한 동화가. 그것은 자기계발서, 에세이, 인문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바로 나 자신에 집중하고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가라는 말.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에는 이러이러하게 살아가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른이 되니 뭘 해야 하는 게 참으로 많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유감스럽게도 동심의 반대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혼란을 맛본 어른들의 마음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단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일까. 어른의 마음을 한 데 묶은 이 책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지은 제목은 "어른만을 위한 잔혹동화". 정보라 작가의 대표작 <저주토끼>를 포함한 10편의 단편이 잔인할 정도로 어른의 세계를 잘 표현했고, 잔혹함이라는 단어와 어른만이 느낄 수 있는 동화(同化)적 세계를 결코 떼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되고 싶지 않았던 어른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 네게 부탁한 적이라도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도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머리> 中



생각해보면 그렇다.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었을까. 아니, 어른이 맞긴 한걸까? 일단 사회가 정한 약속으로는 어른이 맞긴 한데 나는 도저히 내가 어른이라는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어떠한 선을 넘으면 어른으로 휙 변하는 것도 아니라서 더더욱 그렇다. 분명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막상 어른의 나이를 넘겨보니 그때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확실히 어른이 된 뒤로 이전과는 달리 많은 자유와 자격이 생긴 건 맞지만 "진짜 어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뭔가가 부족했다.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할 때 가장 자주 들렸던 단어는 "책임"이라는 단어다. 어른이기에 자신의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모든 어른이 다 온전한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어른도 책임을 외면하고, 회피한다. <머리>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정체불명의 생명체 '머리'의 존재를 외면하려 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변기 속에서 등장한 괴상한 물체는 자신을 '머리'라고 소개하며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것'은 '어머니'가 변기 속에 버리던 머리카락이나 배설물 등을 먹고 자란다고 했고, 때문에 자신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 황당한 그녀는 '그것'을 무시하지만 화장실에 갈 때마다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는 '그것' 때문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별것도 아니잖아?'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여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녀는 진짜 '어머니'가 되었고 자식이 성인이 된 나이쯤 들었을 때 '그것'이 다시 변기 속에서 나타났다. 머리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던 크기가 인간의 형태로 완벽히 자란 상태로 말이다. '그것'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꼭 닮은 사람의 형태였고, 결국 '어머니'를 변기 속으로 밀어버리며 물을 내린다. 어른이 된 '그것'이 '어머니'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처음 '그것'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아니, '어른' 중 하나인 어머니로 불리는 게 몹시 싫었을 것이다. 그녀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계속해서 자신을 찾는 '그것'을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어른으로부터 도피했다. 하지만 자신을 어른이라고 인정하지 않아도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그것'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것은 가능했어도 시간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아이로 남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에 어느 단어를 집어넣어도 이 소설이 완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책임" "어른" "자신" 등 떠오르는 모든 단어가 이 소설을 다양한 방식으로 마무리하게 한다. 진짜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만날 수밖에 없으니. 언젠가 나의 변기에도 '그것'이 찾아올테다. 그때 어른이 된 나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까.



갓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사람이 헛주먹질을 하면 마음이 지치거든, 마음이"
<흉터> 中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가 무서운 이유는 동화의 수위가 높거나 자극성이 짙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른들의 동화가 그토록 무서운 이유는 그들에게 충분히 익숙한 내용이기 때문. 즉, 현실에서 충분히 겪어봤을 법한 내용이 이야기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만들어낸 동화 속 세상보다 더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잔인한 특권이기도 하다. 헛주먹질을 하게 되면 마음이 지치는 이유를 어른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단편 <흉터>에 나오는 소년은 동굴 속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어른들에게 "제물"로써 이용된다. 어른들은 소년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며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소년은 자신의 삶이 비극인 것도 모른 채 살아간다. 처음에는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 난 뒤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 자신의 존재의의이자 자신을 억압했던 '동굴'에 스스로 들어가면서.


동화를 비롯한 수많은 어른들의 목소리는 알게 모르게 아이의 삶을 제한한다. 선과 악을 만들어내며 착한 행동을 해야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다고. 아이가 가끔 "왜요?"라고 물을 때 그들은 대부분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원래 그런 거야' 라거나 '나중 되면 다 알게 될 거야'라는 말로 아이가 걸을 수 있는 길의 폭을 좁힌다. 그렇게 착한 아이가 되는 법은 곧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것으로 공식화된 세상에서 아이는 자연스레 어른 아닌 어른이 된다.



때로는 잔혹동화보다 더 무서운


책을 덮은 뒤 '그럴수도 있겠네'라고 생각한 순간 나 역시 어른에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어른만을 위한 잔혹동화를 이해한 것은 곧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소리니까. 자신의 사업을 위해 경쟁 기업에게 헛소문을 퍼뜨리거나 금덩이를 위해 자기 자식에게 칼을 들이미는 내용은 동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더 잔인하고 기괴한 사건들이 하루에도 몇 건씩 현실에 등장하는 것을 봤을 때 잔혹동화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상이 아닐까.


독서모임으로 이 책을 함께 읽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길 참 다행이다. 아마 이 책으로 북토크를 나눴으면 모두가 책의 내용에 끄덕였을 것이고, 더이상 동심이 존재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다들 우울해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말로 어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어른의 이라면 언젠가는 이 세상에 눈을 떠야 하기 때문에 무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완독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어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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