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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Apr 30. 2023

시선으로부터 뻗어난 뿌리

[소설] <시선으로부터,> - 정세랑

모든 것은 뿌리로부터


우리 부모님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엠비티아이부터 맞는 게 하나도 없는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지금까지 가정을 유지했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아버지는 굉장히 외향적이시고 철두철미한 스타일로 전형적인 사업가 기질을 갖고 계신 분이지만 항상 고집이 세고 자신이 중심이 되지 못하면 답답해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어머니는 집에 있길 좋아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로 인생을 여유롭게 사는 것을 추구하지만 덕분에 무척 덤벙대고 만사를 귀찮아한다. 어찌 이리도 다른데 서로 꼭 붙어 다닐까. 아들이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미스테리다.


아무래도 다리 밑에서 주워온 건 아닌지 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격을 딱 절반씩 가져왔다. 아버지를 닮아 이것저것 도전해 보고 고집도 부리지만 어머니의 감성적인 성격이 곧잘 튀어나와 화악 타오른 불을 소화시키곤 한다. 덕분에 한 가지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여러 관심사를 찍먹하는 성격이 탄생했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뿌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내가 만들어졌다는 감각을 느낄 때면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여기 스스로의 뿌리에 자긍심을 느끼고 있는 자들이 또 있으니 그들은 바로 "심시선의 열매"들이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에서는 예술가 "심시선"의 자녀, 그리고 그 자녀의 자녀로 구성된 가족들이 저마다의 열매를 맺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유교의 '유'자도 질색하는 심시선의 죽음 이후 10년 만에 그녀를 기리는, 아니 스스로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며 그들의 뿌리와 자신의 열매에 대해 곱씹는 시간을 갖게 된다.



나를 위한 제사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p.83)


소설에 워낙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다 보니 작가가 맨 앞페이지에 "심시선 가계도"를 그려놓았다. 300페이지 정도 되는 글에 등장하는 인물만 무려 17명. 게다가 가족 관계로 얽혀 있으니 읽다 보면 누가 누군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나 역시 등장인물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독자 중 한 명이기에 소설 초반부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계속해서 맨 앞장을 왔다갔다 하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심시선의 제사를 위해 하와이에 도착한 이후 더 이상 가계도를 보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지내는 제사의 목적을 알게 된 이후 가계도를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를 찾는 과정에서 그들의 관계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명혜의 저 선언 이후 작품의 방향은 개개인의 일기장으로 180도 변한다.


여행에는 다양한 목적이 존재한다. 경험해보지 않았던 문화를 느껴보기 위해서, 오로지 육체의 피곤을 풀기 위해서, 익숙했던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새로운 사람과 사랑을 만나기 위해서. <시선으로부터,>에서는 열댓 명이 인물이 그리는 열댓 개의 여행이 등장한다. 형식적으로는 할머니를 위한 제사였지만 그 제사의 본질은 자신만의 제사를 지내는 것. 낯설지만 익숙한 장소인 "하와이"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기 위해 살았는지. 또 무엇을 보기 위해 살 것인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핑계가 만들어낸 일탈의 아주 좋은 예시다.




시대운은 존재할까?


엉뚱한 생각도 했다. 어울리고 맞는 시대에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기야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게 아닐까도. 행운이 불운을 상회할 리 없었다. (p.71)


주변에서 인정하는 망상인답게 나 역시도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과연 시대운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시대운을 잘못 타고났다고 불리는 사람은 대부분 당시의 사회적 시선과 동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너무 혁명적이라 별난 취급을 받거나, 당시의 사회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꿈을 가진 사람. 만약 시대운이라는 신의 장난이 존재한다면 심시선의 젊은 예술가 시절이 딱 그러할 것이다.


심시선이 예술가로 활동했을 당시는 20세기 중후반이다. 당시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금처럼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했고 유교적 사상에서도 완벽히 탈피하지 못했다. 여성이 공부하려면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였고, 항상 남성의 사진만이 신문에 대문짝하게 실리는 시대였고, 여자가 예술을 한다고 하면 비웃는 시대였고, 글과 그림을 비롯한 예술을 하기 위해선 관습에 따르고 이에 복종해야 했던 시대였다. 


시대운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심시선은 그때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태어나려고 했을까? 글쎄. 그녀의 청개구리 성격대로라면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때 그 시절을 선택했을 것이다. 제사 문화에 반대하는 그녀가 1999년에 인터뷰에서 "선생 생각이랑 내 생각이랑 어느 쪽이 더 오래갈 생각인지는 나중 사람들이 판단하겠지요."(p.10)라고 말한 것처럼 오히려 차별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증명해 낸 것에 그녀는 자긍심을 느꼈을 것이다. 덕분에 더욱 단단하고 윤기 있는 뿌리가 내려진 것이기도 하고.



나의 뿌리는


평범한 서사를 원했거나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설에 익숙했다면 이 책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은 "멈춰 있는 소설"이다. 작가는 내용의 전개보다 한 사람, 개인에게 집중했다. 이야기의 흐름이 아닌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췄다. 소설을 읽으며 마치 열댓 명의 에세이 작가가 쓴 일기장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매번 짧은 장이 시작될 때마다 등장하는 심시선의 작품에서 역시 또 하나의 서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지만 그 속이 착 달라붙어 있는 김밥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심시선의 뿌리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 뿌리에서 자란 열매가 다시 씨앗을 내리고 또 다른 뿌리가 되었다. 무한하게 뿌리를 퍼뜨려야 하는 뿌리의 운명 속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축복은 그 뿌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과 더 좋은 뿌리를 만들어줘야겠다는 다짐뿐이다. 나의 뿌리를 소중하게 생각함으로써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고, 새롭게 태어나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려는 나의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것. 그것이 명혜가 계획한 제사의 목적 아닐까?


가끔 나의 뿌리가 밉기도 하다. 가끔 나의 뿌리와 소리를 지르며 다투기도 한다. 가끔 나의 뿌리가 이해되지 않아 속상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나의 뿌리가 달라졌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 일은 만약에서라도 존재하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나의 뿌리가 자랑스럽다. 나의 뿌리를 사랑한다.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윤기 있는 영양분으로 나의 뿌리를 이 세상에 내리고 싶다. 자랑스러운 나의 열매를 위하여, 뿌리로 부터 받은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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